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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윤 Jun 11. 2023

평범한 회사원을 만들어 준 내 전공들

휴직 13주 차 기록



모든 형식의 기록을 좋아하지만, 특히 종이에 펜으로 남긴 기록을 좋아한다. 기록하며 정리가 되고, 그 기록을 통해 많은 것을 기억하는 편이다. 그런 나에게 초등학교 일기장,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 박스, 전공필기, 취준노트, 올해 2월까지 1년에 한 권씩 빼곡히 채워내던 열한 권의 업무노트들은 거주지를 이동할 때마다 쭉 함께하고 있다.


서랍 정리를 하다 대학교 시험기간 반듯하게 필기하며 공부했던 A4 뭉치를 보게 됐다. 울컥하는 순간들은 우열을 가릴 수 없지만, 나에겐 대학교 시절이 참 그랬다. 제일 망친 수능성적으로 어떤 곳이라도 가야 했을 때의 무력감. 그 무력감과 좁은 시야로 전공을 선택했었다. 나는 신문방송학, 지리학을 이중전공했다. 두 과목 모두 최소 졸업기준인 48학점씩을 채워 문학사를 2개 받았다. 이렇게 평범한 회사원이 될 줄 알았으면 경영학(문과기준)전공하는 것이 제일 지름길이었을텐데, 덕분에 취업하기도 참 어려웠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대학생 리포터와 정부기관 기자활동들을 하며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신문방송학(이제 대부분의 학교에서 미디어학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수업에 흥미가 생겼다. 앞으로는 더 그렇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사회과학 전공 중 트렌드에 가장 민감한 학문이 아닐까 싶다. 그 시절엔 (벌써 15년이 넘었다. 나이 나옴..) 신문방송학개론 정도만 공통으로 듣고 본인이 희망하는 분야의 수업을 많이 들었다. 나의 경우는 기자나 PR직무를 목표로 했었기에 인간커뮤니케이션, 대중문화론, PR론, 기사작성실습, 언론윤리법제 같은 수업을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비평론이나 영상제작 같은 수업은 거의 듣지 않았던 것이 조금 후회가 된다. 지금보다야 급변하진 않겠지만 그 당시에도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종편방송도 생기면서 언론환경이나 매체 변화가 크게 있었던 시기라 전공서적이 시대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많았었다. 이후 취업을 하고 업무를 하면서도 지금의 미디어 환경에 대해 더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과 회사 실무에서 필요한 갈등관리, 위기관리, 미디어법 등에 대해 세부적으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회사생활 7년 차에 언론대학원과 회사생활을 병행하기도 했다. 매주 과제/발표/시험 이 중 뭐 하나 안 걸리는 주가 없었다. 야근하고 집에 녹초가 되어 와서 다시 발표 준비를 할 때면 '내가 미쳤다. 다시 하면 인간이 아니다'를 천만번 반복했다. (과거는 미화된다지만, 회사와 대학원 어느 하나도 대충 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대충 할 수도 없는 성격 탓에 강도 조절이 어려웠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과정이 미화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저 나 자신에게 수고했다는 말 밖엔 -)


지리학은 고등학교 때 지리를 좋아했으니 교직이수를 해서 지리선생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선택했었는데, 막상 들어보니 내가 그 간 알고 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어떤 지역의 특성을 이해하는 지역지리는 아주 일부였고 (지역지리 관련된 개설된 과목이 극히 적어 유럽지리, 아메리카지리의 이해 같은 도서들도 많이 빌려봤었다), 과학적 검증과 이론에 기반한 계통지리학 (여기서도 인문/자연지리학으로 나뉜다) 수업이 대부분이었다. 지형학 수업 하나를 제외하면 나는 거의 인문지리학 위주의 수업을 많이 들었다. 경제, 도시, 문화, 사회지리 같은 수업들인데 '지리학'이라는 것이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에 대한 공간적 관계이기 때문에 여러 기존의 학문들을 지리적 측면에서 해석하는 연구들이 많았던 것 같다. 지금은 훨씬 더 기술이 발전했겠지만, 지리정보를 수집해서 효율적으로 활용했던 GIS 강의도 있었다.


아무 연관성도 없는 두 전공, '문송합니다' 그 자체인 저 전공들로 취업시장에 던져졌을 땐 참 막막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팔내꼰인가.) 처음엔 기자만 고집하다 나중엔 홍보/PR직무로, 더 나중엔 내 전공들이 '전공 불문'으로 변신하는 슬픈 현실을 마주하고 은행, 기획, 영업관리, 마케팅 직무로도 지원했다. 회신 메일대로라면 '저는 뛰어난 역량을 지녔다고 하셨으면서, 그 회사엔 모셔질 수 없는 건가요' 라며 수백 번 반문했다. 마치 소개팅에서 나도 엄청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는데 남자가 먼저 '우린 안 맞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도망가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어쨌든 지금은 그 모든 시간을 지나, 비상경 문과인 나를 선택해 준 회사가 있어 다행이지만..(초심아 미아나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대학이었지만, 그 대학에서 만난 친구를 통해 지금의 남편을 만날 수 있었고

처음 선택의 의도와는 달리 전공 특색을 살리지 못해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튀지 않는 평범함이 너무 다행스럽고

안의 오랜 학벌 열등감을 없애려 대학원을 간 것도 여러 이유 중 하나였지만, 졸업을 하고 나니 열등감 극복보다는 부지런히 진심을 다 했던 , 꾸준히 나아지려는 내가 대견했다.


합리화일지 모르지만 의미를 부여하니 한결 마음이 괜찮아지는 과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하면 절대 자신 없는 과거, 그 과거의 선택들(전공, 회사, 인간관계..)에 대한 아쉬움과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때의 나는 그럴 수도 있었겠다' 하는 연습. 그리고 언젠가 과거가 될 오늘의 불완전함 또한 조금 더 너그럽게 인정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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