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시작한 지 올해로 8년 차. 매주 한 번 다니던 상담은 어느새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어들었다. 상담의 횟수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나아짐의 척도라고 생각하기에, 상담 선생님께서 'yoon님, 이제 상담 간격을 좀 늘려도 될 것 같은데요?'라고 하시는 말씀이 내심 기쁘고 반가웠다.
그 간 참 많은 주제로 상담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을 돌이켜보면 선생님 말씀은 다 맞고 다 알겠고 내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인정하는데, 막상 실제의 내가 그렇게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영화는 120분, 드라마는 16부작, 아무리 큰 시련도 어려움도 주인공이 가진 문제는 그 시간 안에 해결되는 것 같은데 내 상태는 늘 제자리인 것 같은 느낌. '아니 다 알겠는데 그렇게 안 살아진다니까요. 나도 답답하다고요' 징징대는 횟수는 이전보다 확실히 줄었지만 아직도 이렇게 혼잣말을 툭 내뱉을 때가 있다. (살찌는 거랑 누워있는 거 빼곤 쉬운 게 없다 증말)
아들러 심리학이 잘 나와있는, 미움받을 용기를 읽으며 책 모서리를 참 많이도 접었다. (나는 다시 보고 싶은 문장이 있는 페이지의 모서리를 접으면서 읽는다.) 내 기억에 책이 준 교훈은, '과거는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따라 달라지며, 언제라도 새롭게 결심하고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 한 문장을 살아내는 것이 어려워 긴 시간 상담받으러 다니는 게 나란 사람이긴 하다만.
휴직을 하고는 좋은 점만 가득할 거라 생각했지만, (물론 실제로도 좋은 점이 많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 감정을 마주할 시간이 참 많아졌고, 그 넘쳐나는 여유 사이로 과거의 일들이 불쑥 찾아와 끊임없이 마음을 건드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례했던 순간들, 그 보다 더 무례했던 사람들. 그 무례한 사람들에게 마저 둥글둥글한 사람이 되고 싶어 대충 괜찮은 척했던 기억들. 당장의 불편함이 싫어 상대의 무례함을 온전히 수용하거나 극단적으로 회피했었던 날들. 그 당시 해결해 놓고 오지 못했던 소소한 분노들은 지금처럼 고요하고 잔잔한 순간을 맞이할 때 더 극대화되기도 했다.
1. 신입사원 연수시절, 엄마가 사 주셨던 새 구두를 잠시만 빌려신겠다고 신고 나갔다가 굽을 다 망가트리고 왔던 동기 (이후에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지만, 가서 묻지도 못했음)
2. 입사 첫 배치 이후 맞이한 발렌타인데이, 정성스럽게 포장해 간 초콜릿을 건네자 마자 본인 사물함 안에 던지며 다신 이런 거 하지 말라며 짜증 냈던 여자 상사 (너무 무서워서 화장실에서 엉엉 울었음)
3. 회사생활 7년 차 때 만난 팀장의 온갖 무시와 멸시 섞인 눈빛, 표정. 아무것도 마음에 안 든다는 말투, 단톡 (퇴사충동 100%.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음. 매 년 한 두 명씩 패는데 그 해엔 내가 제물이었던 것 같음)
4. "ooo(남편직업), 그거 아무나 다 되는 거자나. 요즘 전망도 별로 없고"라고 술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선배 (본인은 이 말 한 거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음)
5. 회사 동료와의 약속시간 2시간 전, 아기가 아파 못 만날 것 같다고 약속을 취소하더니 몇시간 뒤 SNS에남편과 맥주마시러 나왔다고 버젓이 사진를 올린 동료(기분 별로였음)
(이 외에도 생각하면 발작버튼이 눌려지는 순간이 많지만 쓰고 보니 다 회사사람 ㅋㅋ) 저런 상황에서 감정의 동요 없이 따져 묻거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어디 쉬웠겠냐만,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그 무례한 사람들에게조차 미움받을까봐 최소한의 할 말도 하지 못했던 그때의 나는 너무 힘없고 나약했다. 저런 사람들의 특징이 꼭 사람을 골라가며 무례한 행동들을 한다는 것인데, 무례하게 대해도 되는 사람, 무례하게 행동해도 결국 숙이고 들어올 사람이라는 본인들만의 범주에 내가 들어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내 나름의 배려와 친절들은 형태를 바꾸어 그들에겐 만만한 사람으로 비추어 졌던 것 같다.
다시 저런 유사한 사람들과 무례한 순간들을 만난다면 이렇게 해야지. 그리고 이 글을 쓰고 나면 그 때의 무례함은 다시 생각하지 않기로.
1. (구두를 들고 가서) "굽이 왜 이렇게 된 거냐. 망가트려놓고 말도 안 하고 신발장에 넣어놓으니 당황스럽다" 사과를 받아내기 힘들다면 내가 느낀 감정이라도 전달
2. "입사하고 첫 발렌타인데이라 다른 동기들도 부서에 준비한다길래 가져왔는데, 불편하셨나 보네요. 다음부턴 안 하겠습니다."라고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
3. "죄송합니다" 하지 않기 (생각해 보니 진짜 1도 안 죄송함). 화장실 세 번째 칸 가서 울지 않기. 내가 이 상사의 업무 스타일에 안 맞는 것일 뿐,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고 계속 생각하기 (실제로 그게 맞기도 함). 마음의 금을 긋기.
(+) 휴직하던 날 짐을 옮기면서 그때 그 팀장을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쳤다. 눈인사만 까딱하고 지나가려는데 갑자기 불러 세우더니 '이 짐 뭐야? (저 난임휴직합니다. 짤막한 대답). yoon차장, 혹시 나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 너무 많이 줘서 아기 안 생긴 건 아니지. 내가 그땐 너무 미안했어. 나도 그때 왜 그렇게 ㅈㄹ을 했는지 모르겠다. 미안했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미안하다 한 마디로 그때 그 모든 행동을 덮으려는 것도 참 그분 다운 대처였다. 본인의 마음의 짐을 덜어버리려고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과도 내가 안 받으면 그만. 근데 미안할 일을 왜 하셨어요?
4. "그러게요. 아무나 다 되는 건데 저는 못 했어요. 근데 우리 회사가 더 전망 없는 것 같기도 한데"라고 말에 뼈를 섞어 던지기
5. (인스타를 캡쳐하고) "아기 아프다더니 나갈 수 있었나 보네. 약속까지 취소하길래 크게 아픈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라고 단호하고 찔리게 톡 보내기
꼭 회사가 아니더라도 일상의 무례한 인간(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이다)들은 너무 많다. 이제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선을 넘으려는 사람들에게 '그냥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하고 싶지 않아 졌다. 나이가 들면 둥글둥글해진다지만 나는 더 각 잡힌 네모가 되기로 했다. 굳이 맞지 않는 사람, 무례한 사람, 불편한 사람에게까지 애쓰며 맞추며 살지 않고, 맞는 사람에게 더 잘 맞추고 싶다. 물론 단호해지려면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적당히 불편한 사람이 되어야 함부로 대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원래 성격대로 사는 것도 그 나름의 장점들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잔잔한 분노가 수시로 찾아온다는 것은 분명 단점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친절하고, 좋은 게 좋고, 나아가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과거의 나에게도 자문한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친절도 나를 지키지 않는 상황에선 소용없는 게 아니었냐고. 내가 그리는 (그래서 실제로 노력하고 있는) 이상적인 성격에도 단점도 있을 테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떳떳하다는 확실한 장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편안해지기 위해 적당한 불편함을 선택하기로.
열을 내며 열심히 썼지만, 사실 이런 생각조차 나지 않게 구김 하나 없이 행복하고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은게 진짜 마음. 언젠간 그럴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