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취준 중인 (11살 차이) 남동생의 뜬금없는 합격 소식이었다. 공부엔 흥미라고는 없다고 생각했던 남동생이 한국사 1급을 따게 만들어주다니. 요즘 취업도 진짜 힘들긴 한가보다- 하는 생각도 잠시, '남동생도 땄으면 나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도 역사 수업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지만, 살면서 딱히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다 보니 무작정 달달 외우던 내용들 (자다가 일어나도 빗살무늬토기! 반달돌칼! 이라고 외칠 수 있을 것 같은 신석기, 청동기 등 고대사회를 시작으로 삼국 전성기, 남북국 시대, 침략만 당하던 고려, 왜란/호란과 붕당정치의 조선왕조 500년, 늦었던 개항, 일제 강점기, 현대사 - 정도의 아주 지극히 상식 수준의 플로우) 외의 상세한 내용들은 유튜브에서 다시 설명해 주거나 책을 읽으면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되어있기도 했고, 사실 세세한 내용들은 거의 휘발되기도 했다.
상식 수준의 역사 흐름도 뒤죽박죽 되어있거나, 조금만 자세히 들어가도 잘 모르겠는, 사극도 역사 관련 영화에도 딱히 흥미가 없어 자잘한 역사 이야기들도 잘 모르는 - 상태가 지금 나의 역사 지식의 수준이었다(좀 부끄럽긴 하군). 몰라도 그만이지만, 지적인 40대를 위해 (얼마 전에 2살이 줄어 이제 37세이긴 하지만, 어쨌든! 아니 이건 지적이라는 대단한 단어를 붙이기도 민망하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알아야 하는 상식이긴 하다만 -) 헷갈리는 흐름과 사실만이라도 시간이 주어졌을 때 다시 한번 정리하고 바로 잡자는 차원에서 한국사시험을 접수했다.
시험까지 남은 시간은 D-14. 남동생이 보던 교재로 최태성 선생님의 유튜브 무료강의를 1.5배속으로 듣기 시작했다. '남동생도 1급이라는데 한 2주 바짝 하면 되겠지'- 하고 얕잡아 봤지만, 반만년 역사를 14일 만에 공부하려니 생각보다 양이 너무 방대했다. 늘 모든 공부의 앞부분은 화력이 활활 타지만 (그래서 고대사회는 늘 그렇듯 줄줄 외우는 지경까지 감) 중간쯤 되어가니 '아- 하지 말까. 그냥 꼭 시험 봐야 되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 수업만 천천히 들어도 되는 거 아닌가. 취업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지' 슬슬 늘어지기 시작하며 현타도 살짝 왔다. 하지만 최태성 선생님의 강의 내용이 참 좋았고, A4용지에 반듯반듯 정리되고 한 장씩 쌓여가는 필기도 좋았다. 총 40강 (유튜브 영상 숫자로는 124강, 2150분..ㄷㄷ) 수업을 도장 깨기 하듯 들었다. 무엇보다 역사 강의를 들으며 필기를 할 때만큼은 딴생각 잡생각이 안 나서 좋았다.
역사 지식이 다시 하나씩 정리되고,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가물가물한 것 같기도..)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게 되어 가는 과정도 물론 좋았다. 하지만 진짜 좋았던 것은 나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간접적으로 듣고 배우면서 조금이나마 현재의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최태성 선생님께서도 삶을 바로 잡고 싶을 때마다 역사책을 펼친다고 - 100년, 1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비슷한 위기를 겪고, 극복했다고 하며, 역사가 나침반이 되어준다고 말씀하셨다.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642년 삼국통일의 주인공이 된 사실, 통일신라 골품제 사회 속에서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흙수저 장보고, 서희의 윈윈 외교담판으로 가져온 강동 6주, 정조라인의 대표학자 정약용이 유배생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책을 써냈던 일, 서민들의 어려움을 생각해 대동법을 끝까지 주장하고 도입시켰던 김육, 그 어렵고 외우기 싫던 근현대사의 독립군 이름은 사실 우리가 항일활동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라는 것 등.. 이처럼, 역사는 단순히 과거를 나열하고 정리하는 것이 아닌, 그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지혜와 용기와 해결책을 배워 나의 현재에 끊임없이 적용시킬 수 있는 기준점이 되는 것 같다.
공부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접근할 수 있는 책과 콘텐츠들이 요즘 세상엔 엄청나다. 부동산, 주식, 금융처럼 돈 되는 공부에는 늘 관심도 없고 잘하지도 못하는 나는 이번에도 돈 안 되는(?)역사를 공부했다. 겉으로 보기엔 돈 안 되는 공부일지 몰라도 이제 역사 지식에 대한 열등감이 조금 덜 든다는 것,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갖추어진 긴 과정을 (벼락치기로) 다시 공부하며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것, 앞으로의 고민과 위기에 대해 나를 가장 먼저 돌아보고, 타인에게 기대기보다 역사나 인문학 책에 기대기로 다짐한 것. 나에게 돈 되는 공부 이상의 의미다.
어쨌든 벼락치기로 본 65회 한능검 시험 결과는 100점 만점에 78점으로 2급 합격. (1급인남동생한테무시 당하는 중 ㅋㅋ) 역사 이야기는 너무 재밌었지만, 문제를 푸는 것은 또 달랐던 것 같다. (근데 난 정말 로또, 각종 객관식 시험 등 항상 찍는 건 단 하나도 맞지 않음. 아! 정말 정직한 인생이여 -) 마지막에 한 문제 고친 거 추가로 더 틀림. 한 문제만 더 맞았으면 1급이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역사의 의미를 알게 된 정도로도 충분히 좋은 공부였다. 당분간은 어떤 종류의 시험도 안 치는 것으로. 제발-
(+)그리고 이 글을 보시진 않겠지만, 한국사를 단순암기과목에서 의미의 과목으로 만들어주신 최태성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