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써내려가고 싶은 생각들은 한가득인데, 무엇부터 써야할지 모르겠는 느낌. 무언가 한가득 머릿속에 있는데,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없는듯한 느낌. 지금 이 글을 쓰는 제 머릿속이 딱 저런 상태에요. 뭔가 무진장 많은데, 또 없네요.
그래도 한 번 찬찬히 적어보자면. 그러니깐,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바빴습니다. "한 주에 한 번,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서 커피와 디저트를 먹으며 그 주를 돌아보고 브런치에 글로 남겨놓자."고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도 말이죠. 근데 이게 누군가에 의해 바빴다기보다는 제가 저와의 약속들을 지키기 위해 바빴던 상황이라, 딱히 스트레스 받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차근차근 꾸준히 해나가는 제 모습이 대견해서, 잠들기 전 감사한 마음으로 셀프 토닥토닥을 하곤 했죠. 실제로 많은 일들을 해냈습니다. 뿌듯. 그런데 변수가 있었어요. 바로 저의 플랫메이트.
현 주거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저는 아주 만족해요. 제 방은 제가 원한 밝으면서도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로 완성되었고, 한 아이템을 요모조모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마다 유레카를 외치며 미니멀한 일상의 기쁨을 느끼고 있답니다. 그런데 저의 플랫메이트. 알면 알수록, 저희 둘은 너무 다르더라고요. 소비패턴, 수면패턴, 위생개념 등등. 근데 뭐 이건, 어느 정도 예상했고 각오했어요. 공유한다는 건 혼자 사는 것보다 불편할 수 있는게 너무나도 당연하고, 계약 전 '인터뷰' 당시에 약 6시간의 대화를 통해 서로 어느 정도 공유했거든요. (여담이지만, 독일에서 WG를 구할때 현 입주자가 새로운 입주자와 fit을 확인하기 위해 짧은 인터뷰와 같은 대화를 해요, 이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1시간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저에게 '일종의 환상 + 기대감'을 갖고 있다는 건 몰랐던것 같아요. (이 친구는 한국 드라마를 엄청 좋아해요. 저보다 더 잘 알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그 친구의 요구로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눠보았는데, 이를 통해 '건강한 관계'와 '경계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약 1시간이 넘는 대화였기에 그 친구가 저에게 말했던 것들은 정~~말 많이 있었지만, 그 중 일부만 이야기해본다면, 1) 플랫메이트가 제가 뭘하는지 볼 수 있도록 방문을 항상 열어놓기 (잠자는 시간은 괜춘), 2) 매일 일정 시간 이상의 깊은 이야기 나누기, 3) 저의 사춘기, 유년 시절, 가족, 친구 이야기 등 자세히 설명해주기, 4) 한국 음식 레시피, 문화, 한국어 알려주기 (특히, 한국 화장품 추천해주기) 등. 대부분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칙이나 내용이라기 보다는 그 친구가 저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들에 가까웠어요.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그 친구가 무척 화를 내면서 이야기한, '친구가 되어달라는 요구'였어요. 이 내용들을 포함한, 그 친구가 쏟아내는 솔직하다 못해 날것의 감정과 생각들을 쭉 듣고 있자니, 하나의 영화를 보는것 같았어요. 장르는 심리 스릴러.
그런데 사실 뭐랄까, 저는 어느 정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같이 사는 사람이니 알고싶고, 궁금할 수 있죠. 그리고 그 친구는 저에게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긴 했거든요. 다만, 그 내용들이 대부분 아주 개인적이거나 부정적이어서, 저에게는 걱정이 되는 내용들이었어요. 예를 들면, 전 세입자들의 사적인 이야기와 싫었던 점들을 아주 디테일하게 공유해줬는데, 솔직히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너무 사적인 이야기들을 듣는건 불편했어요. (그들의 가족, 연애, 정신건강 이야기 등) 특히, 그 친구가 무척 싫었다고 하는 부분들에 대해 엄청 조심하게 되더라고요. 이게 싫다고 했으니 안 그래야지, 조심해야지. 이왕이면 같이 사는 만큼, 나쁘지 않은 플랫메이트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친구가 되어달라는 요구, 저는 이 지점이 흥미로웠어요. 같이 지낸지 2주 반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우리는 왜 친구가 아니냐"는 말을 듣게 될 줄 몰랐거든요. (너 내 동료가 되라..?)
저는 많은 걸 공유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조금 사적인 편이죠. 힘든 일, 고민들은 가족에게도 잘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에요. 제가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괜히 무겁게 하는게 싫고, 결국 제가 헤쳐나가야하는 경우들이기에 어느 정도 해결되면 이야기 하는 편이죠.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의 서운함을 알게되어서), 조금씩 가까운 이들에게는 소통하면서 제 마음의 무거움을 조금씩 나눠보는 연습을 하고 있답니다. 사실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도, 조금씩 제 생각과 마음을 꺼내보는 연습을 하고 있는거에요. (노력중) 그런데 아직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대놓고 요구받게 되니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친구가 저에게 말한 내용과 태도, 특히 화를 내는 게 인상깊었어요.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날까. (근데 솔직히 저도 조금 빡치더군요) 그래도 일단, 이 날은 그 친구 이야기를 최대한 들어주며, 저도 제 생각과 감정에 대해 조심히 그러나 확실히 전달하며 여차저차 마무리했습니다. (다른 케이스들은 어떤지 알고 싶어서, 현지 친구들에게 WG 생활에 대해 물어봤는데요. 공통된 결론은 이 친구가 꽤나 독특한 케이스라는 것이었습니다. 핳)
다음 날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경험 또한 내가 미숙한 어떤 부분을 채워가기 위함일텐데 그게 대체 뭘까. 여느 때와 다를바 없이 하루하루 바쁘게 제 일상을 살아내고 나니, 생각이 좀 더 명료해지더군요. "이 경험은, 나의 선택, 상황, 생각에 대해 매번 설명하거나 정당화하지 않아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은 연습"일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부터 조금씩 필요성을 느꼈던 부분인데, 이렇게 본격적으로 연습하게 될줄이야. 사실 저는, 잘 알지 못하는 타인일지라도 저에게 저에 대해 무언가 물어보면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사람이었어요. 그게 사적인 질문일지라도, 제가 공유해서 상대가 저에 대해 오해하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하면 공유하는 편이었죠. 즉, 질문을 받으면 이에 대해 답해야한다는 일종의 책임감? 의무감?을 느끼는 편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냥 오해받기 싫었던게 컸던 것 같아요. (부질없도다) 근데 제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들을 경험했고 (뒷통수 레고 & 파국이드아ㅏㅏ), 그러면서 제가 생각하고 느끼는 저의 사적인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저의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을 누구와 어떻게 공유하는지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생각하고 조금씩 시도해보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런 의미로는, 아주 나이스 타이밍 그 잡채인것 같아요. 이 친구는 저에게 많은 걸 설명해주길 매일 같이 요구하고 있었거든요. (왜 이 화장품을 쓰는지 어디서 살 수 있는지, 오늘 만난 친구들은 누구고 어떻게 알게 되었고 무얼 먹었고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등등) 대답해주면서 이상함 그리고 불편감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는데, 지난번의 딥톡으로 제가 느낀 불편함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알게되었어요. (사실 이 글을 쓰면서 좀 더 분명해지는것 같아요. 역시 본인의 생각과 감정을 들여보는 방법으로는 글쓰기가 최고입니다ㅏ.)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제가 여기에서 맺은 인연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 다시금 깨달았어요. 아마도 저에게 이런 감사한 인연들이 있었기에, 이 친구의 쏟아냄에 당황하지 않고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침착하게 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지도 몰라요.
이 친구와 어떤 플랫메이트 관계를 만들어갈지, 솔직히 모르겠어요. 다만, 같은 플랫에 사는 만큼, 그 친구와 저의 중간지점에서 만날 수 있도록 저의 최선은 해보려고요. 왜냐면 이번이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과의 제 인생 마지막 플랫셰어가 될거라 거의 확신하거든요.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ㅋㅋㅋ) 이렇게 또 하나 배워나가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가끔은 편리함과 편안함이 아닌, 불편함이 필요할 때가 있거든요. 지금 이 시점이 저에게 그런 단계인가봐요. 그리고 사실 WG 생활을 통해 얻는게 분명히 있거든요, 돈 절약이라던가, 돈 절약이라던가, 돈 절약이라던가? 그리고 이렇게 아낀 돈으로 저는 올 연말 아주 재미난 경험들을 계획중이랍니다. 사실 이 계획들을 생각하면, "에이, 이 정도 쯤이야" 싶어져요. 이쯤되니 이 글의 제목이 떠오르네요. 이번 글은 '조금 긴, 생각 정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