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이전과는 달라진다는 것이 아닐까?
‘시작’이라는 단어에서 나는 ‘변화’를 느낀다.
<콰이어트>에서는 자극에 대한 반응도로 내향성과 외향성을 구분한다.
우리 아들은 <콰이어트>에서 말하는 자극에 예민한 내향성 기질을 타고났다.
어릴 적부터 낯선 사람과 장소를 경계하고,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두려워했다.
기질적 원인도 있지만, 실은 내가 일조한 부분도 있다.
아들이 드러내는 시작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보면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초보 부모로서 아이에게 했던 실수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이가 기저귀를 뗄 무렵, 무언가를 수없이 새롭게 시작해보려던 때였다.
아이는 혼자 물을 컵에 따라보기도 하고, 어른 변기에서 아빠 흉내를 내며 용변 연습을 하며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을 알아가고 있을 때. 무지했던 부모는 그런 시작을 축하해주지는 못할망정 한 마디 조언을 덧붙이거나, 실수를 나무랐다.
실은 나도 어린 시절 비슷한 기억이 있다. 가족을 돕고 싶은 마음에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할 때 “얌전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가만히 있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익숙한 그 말이 나도 모르게 아이 앞에서 튀어나왔다.
‘시작’해보려는 행동에 대해 지적하는 부모 때문에 아들은 자주 좌절감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커갈수록 아이는 ‘시작’에 점차 주저하고 무서워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아이가 5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아차렸다. 아이의 불안과 두려움이 시작과 도전에 대한 용기와 기대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그제야 우리 부부는 깊이 반성하고 달라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부터였다. 아들에게 매일 “넌 할 수 있어!”를 외치기 시작한 것도.
얼마 전 아들이 좋아하는 미술학원에서 심리화를 그렸다. 한 달에 한 번 심리 미술 활동을 하는데, 미술치료를 전공하신 선생님과 함께 하는 풍경 구성법(LMT)을 활용한 활동이었다.
도화지 왼쪽 한 편에 집 한 채가 그려져 있다. 집 오른편으로 쭉 뻗은 길이 있다. 집 앞 길목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고, 돌무더기 너머 작은 산이 있다. 그림 속 주인공은 그 산을 넘어 펼쳐진 꽃길 위를 걷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 속의 돌은 어려움, 장애물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림 속 집 앞에 쌓여있는 돌들을 보고, 선생님은 그것이 시작을 어려워하는 마음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동안 지켜봐 왔던 아이의 두려움이 느껴져 가슴 아팠다.
그러나 다시 선생님은 다른 부분에 주목하셨다. 그림 속 아이의 위치는 이미 그 돌무더기와 산을 넘어 꽃길을 걷고 있다는 것. 그것을 유추해 보면 시작은 굉장히 힘들어 하지만, 막상 해 보면 예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라고.
그림 속 아이의 위치는 나에게도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였다. 그동안의 애씀에 대한 인정이었다. 최근 몇 년간 시작을 두려워하는 아들에게 용기를 주려고 부단히 노력해왔다. 시작을 앞두고 주저할 때마다 응원하고, 실패라고 느낄 때마다 격려해주었다. 아들은 여전히 시작을 어려워 하지만, 이제는 그런 자신을 응원하고 다독이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다.
이것이 비단 우리 아들만의 문제일까?
시작하려고 할 때 느끼는 마음의 돌무더기는 크든 작든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 돌무더기를 무너뜨리고 시작할 것인가, 돌무더기에 지레 겁먹고 다시 안전지대로 들어가 버릴 것인가.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시작할 때 보이는 돌무더기와 산을 이겨낼 수 있다고.
나는 그 모든 시작을 응원하고 싶다.
아들의 그림 속 장면처럼
돌무더기와 산을 넘어가 펼쳐질 꽃길을 마주하자고
격려하고 싶다.
이제는 안다.
시작하는 이에게는 조언과 충고가 아니라
자신의 힘을 믿어주는 응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변화를 시작하는 당신이
용기 내기를
힘껏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