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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기일 Oct 19. 2018

애기능 - 2018

2018년

"있잖아요, 혹시 이 책 읽어봤어요?"

 

그녀가 나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다. 벚꽃이 흐드러진 계절에 애기능 동산에 책 한 권과 함께 앉아있던 그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자 그녀가 나에게 다가오면서 한 말이었다. 당시 나는 군대를 막 마치고 전역한 복학생이었기에 여자와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약간은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나에게 말을 걸어왔기에, 바보같이 얼버무리며 대답을 하고 그녀가 나에게 내민 책의 겉표지를 슬쩍 보았다. [데미안]이라고 써져 있었다. 군대에서 시간이 하도 가지 않아 펼쳐본 적이 있던 책이었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난해하다고 생각하여 고개를 저으며 덮었던 책이었다. 당연히 그 책은 아무도 꺼내보지 않았고, 퀴퀴한 먼지가 쌓여가는 모습만이 기억이 날 뿐이었다.

 

"아니요, 그래도 예전에 조금 읽어본 적은 있어요."

 

그녀는 얼굴 표정이 밝아지더니 책에 대해 줄줄 읊기 시작했다. 이 책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라는 것부터, 작가인 헤르만 헤세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까지 책에 대한 정보를 쉴 새 없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던 이 장황한 웅변은 끝이 났고, 나는 진이 다 빠져 골골대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이런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자신의 말을 들어준 보답으로 커피를 한 잔 사준다 하고서 커피숍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커피숍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주말이라 안암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람이 별로 없는 듯했다. 그녀는 커피는 잘 마시지 않는다 했기에 오렌지 에이드 하나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아 음료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음료가 오기 전까지 시간이 비었기 때문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왜 저를 그렇게 쳐다보고 계셨어요?"

 

갑자기 들어오는 질문에 적잖이 당황한 나는 입 밖으로 낼 문장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혹시나 스토커 같아 보일까, 혹은 변태 같아 보일까, 온갖 당혹스러운 상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눈길을 그녀의 얼굴로 살짝 가져갔더니, 날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선이 보였다. 다시 눈을 피한 후에도 따가운 시선이 날 콕콕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주문한 커피가 나왔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자 정신이 들어 그녀에게 최대한 간결하게,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어... 벚꽃과 정말 잘 어울리는 분이라고 생각해서요."

 

그녀는 의외의 대답에 놀랐다는 듯 뺨을 붉게 물들였다. 애기능의 벚꽃색을 닮은 분홍빛 뺨에 다시 한번 설렘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외에는 내 말에 대한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서로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유난히 활기차고 명랑했다.

 

"그런데 왜 애기능에 앉아계셨던 거예요?"

 

나는 이번 학기에 들어야 하는 수업 덕분에 애기능을 가로질렀어야 하는데,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항상 그녀가 앉아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지만, 무엇을 하든 애기능의 똑같은 나무 아래, 똑같은 각도에서 그녀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켜본 지 오래됐다는 말을 꺼낸다면 이상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항상 애기능에 앉아계셨던'에서 항상이라는 단어를 생략했다.

 

"그냥요, 따뜻한 날에 그곳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별 것 아니라는 듯 그녀는 오렌지 에이드를 홀짝이며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그녀를 지켜본 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그녀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근심거리를 가득 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나마 혼자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본 것이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뭔가 사연이 있어 그곳에 앉아있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지만, 더 캐물으면 실례가 될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와 나는 꽤나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는 곳은 어디인지부터, 심지어 군대 이야기까지 했다. 별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집요하게 물어와서 어쩔 수 없이 대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예전에 겪었던 일들을 설명해주자, 그녀는 군대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며 분홍빛으로 웃어주었다. 끊임없던 이야기를 겨우 끝마치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있었다. 헤어질 무렵 손을 떨면서 휴대전화를 내밀었는데, 다행히도 그녀가 자신의 전화번호를 찍어주었다. 집에 가서 카카오톡을 확인해 보니 그녀의 이름과 함께 카카오톡 프로필이 떠 있었다. 오늘은 즐거웠다는 말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이모티콘이 답장과 함께 왔는데, 그녀를 닮아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리 애기능에서 만날래요?]

 

그 후 그녀를 만난 것은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녀에게 먼저 연락이 왔었는데, 시간 나면 얼굴이라도 잠깐 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마침 수업도 끝나고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있다고 한 애기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팔랑팔랑 떨어지는 벚꽃들 사이에서 그녀는 아직 데미안을 읽고 있었다. 그래도 페이지 수는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보니, 그동안 열심히 읽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가 읽던 책을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자,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이내 날 알아보고 미소를 지었는데, 커다란 눈망울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안 부르시고 책을 들여다보고 있어요"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을 알고 싶어서 그랬다고 말해주었더니, 저번에 말해준 것을 벌써 잊어버린 것이냐며 투덜거렸다. 그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잠시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그날 저녁 동네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지만,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에 저녁에 약속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한 후,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버스에 타게 되었다. 버스 안에서 동네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오늘 사정이 있어서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미리 말을 해 놓았다. 그 후 친구들이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 알림을 꺼 놓았다. 내가 카카오톡을 하는 것을 보며 그녀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며 미간을 좁히더니, 나에게 물어왔다.

 

"여자 친구 있어요?"

 

글쎄, 어떨 것 같아요? 라며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질문해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진지했기에 나는 맥없는 목소리로 '없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흐음-하며 알다가도 모를 듯 다시 눈을 창 밖으로 돌리고, 그 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버스에 사람이 많아서 그런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우리는 한강에 와 있었다. 나는 한강에는 별로 와 본 기억이 없어서, 그녀의 손을 지도삼아 앞으로 가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몇 분 걷다 보니, 커다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다리에는 딱 두 명 정도 앉을만한 벤치가 있었는데, 그녀가 팔랑팔랑 벤치로 다가가더니 먼저 자리를 차지했다. 내가 멀뚱히 있자 그녀는 얼른 옆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고사리손에 이끌려 온 이 장소는 생각보다 멋진 경치를 가지고 있었다. 때마침 일몰시간이었기 때문에, 노을이 다리 위의 풍경에 운치를 더했다.

 

"너무 예쁘지 않아요? 저는요, 얼마 전부터 여기 노을에 매료됐어요. 다리 위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풍경이라고 생각해요."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표정만큼 밝지 않았다. 하지만 억지로 짓는 표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아마도 정말 이 노을에 매료되어 있을 것이다.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한 번씩 둘러본 나는 씩 미소를 지으며 이 장소에 대한 감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내가 이 장소를 좋아하는 것을 본 그녀도 기분이 한층 좋아진 것 같았다. 그녀는 기분이라며 자신의 가방에서 오렌지 주스 두 개를 꺼냈다. 원래는 혼자 마시려고 산 건데, 내가 보는 눈이 있는 것 같아서 특별히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오렌지 주스에는 [행복하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고, 내 주스에는 [즐거운 하루^-^]라고 적혀있었다. 요즘 오렌지 주스에는 문구도 적혀있구나 싶어 주스를 유심히 살펴보던 나에게,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갑자기 그녀가 나에게 던지는 철학적인 질문은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노을을 바라보며 그런 말을 하는 그녀의 눈에는 슬픔이 어려 있었다. 왜 그런 말을 나에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뭐라도 말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간단히 내 생각을 전했다.

 

“음.. 지금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요? 하루하루 충분히 멋지게 살고 계시다고 생각해요.”

 

뭐, 멋진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솔직한 내 심정을 말했으니 이 정도면 됐나 싶어 오렌지 주스를 마시기 시작했다. 빨대를 꽂고 한번 쪽 빠는 도중, 옆의 분위기가 이상해서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조금의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비쳤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싶어 그녀에게 사과의 말을 하려는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영문을 모르겠어서 잠시 고개를 그녀 쪽으로 돌린 채 가만히 있었다. 이제 막 눈물을 다 닦아낸 그녀는 나에게 갑자기 울어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데미안이라는 책,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 책은 사실 얼마 전에 읽게 된 거였는데, 완전히 매료되어버렸어요. 얼마나 마음에 쏙 들던지, 몇 번이고 읽어봤어요.”

 

그제야 그녀가 책을 천천히 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몇 번이고 보았으니 페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그 말을 한 후 이제 집에 가자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녀만의 슬픔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캐묻진 않았다. 남의 상처를 들추어내면 앉으려 했던 딱지도 떨어질 테니, 그런 짓을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광화문 서점에 들렀다. 집과는 정반대 방향이었지만, 집 주변에 마땅한 서점이 없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서점으로 향한 결과였다. 베스트셀러 칸에 가 보니 그녀의 애독서가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책 설명으로 [너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라!]라는 문장이 장식되어 있었다. 아무 망설임도 없이 그 책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책 값이 꽤나 비쌌지만,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한 번 읽어봐야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의 구석에 있는 내 방에서, 나는 책을 천천히 넘기기 시작했다. 예전에 한 번 조금이지만 읽어본 책을 다시 펴본다는 것은 나에게 낯설게 느껴졌다. 헤르만 헤세의 단어들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싱클레어의 모든 글을 그날 밤 모두 읽어 내렸다. 싱클레어의 고뇌, 그리고 데미안의 신비로운 모습과 함께 나는 그날 밤을 지새웠다. 어렴풋이 주제가 와 닿는 듯했다. 주인공이 방황 속에서 신비로운 무언가를 만나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는 이야기였으니, 그녀가 역시 짐작대로 방황하고 있었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버렸다. 방황하는 그녀에게 데미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으니 애기능에서의 그녀가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그때 흩날리던 벚꽃들이 어지러워 보였다.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내 손은 그녀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밥을 먹고 하품을 하며 폭풍의 언덕 쪽으로 걸어가던 도중 갑자기 튀어나온 그녀가 날 부르더니,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며 대뜸 안암역으로 끌고 갔다. 가는 길은 뭐 이리 복잡한지,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탄 후 버스를 타고 심지어 내려서 조금 걸어가야 했다. 고생 끝에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한 보육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이들이 보였다. 시설은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상하던 것보다는 훨씬 괜찮았다. 시설 담당자와 몇 마디 말을 한 후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에게 저렇게 대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해 보였다. 나는 워낙 붙임성이 없어서 그런지,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녀가 내 손을 또 잡아끌며 아이들하고 이야기도 하고 같이 놀아보라고 날 아이들 사이로 날 밀어 넣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순식간에 단절된 난 어쩔 줄 몰라하며 아이들에게 멋쩍게 인사했지만, 아이들의 관심은 그녀에게 온통 쏠려있었다. 오기가 생겨 아이들에게 관심을 끌어보려 별 짓을 다 해봤지만, 아이들은 쉽게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아이들과 그렇게 잘 어울리세요? 전 도저히 안될 것 같은데요."

 

내가 기진맥진하여 의자에 주저앉아 한탄하자 그녀는 웃으며 나에게 자신은 여기 몇 번 온 적 있다고 말해주었다. 자신도 이렇게 되기까지 꽤 오래 걸렸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보육원 봉사를 다니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왜 이런 활동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져 그녀에게 왜 여기에 와서 봉사를 하느냐고 물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어떤 느낌일까.. 싶어서요. 정말 외롭고 힘들지 않을까, 이 아이들은 왜 버려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 아이들에게는 죄가 없어요. 단지, 상황이 너무나도 좋지 않았을 뿐이죠. 어쩌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수도 있겠죠."

 

말을 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슬퍼 보였다. 그것이 단순한 아이들에 대한 연민인지, 아니면 더 깊은 사정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 말을 한 후 한참을 바닥을 응시하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워 보였다. 괜한 질문을 했나 싶어 사과해야 할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지난번 다리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나 또한 숙연해져 고개를 숙였다. 자연스럽게 아래로 간 시선에 그녀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하얗고 가녀린 손이었다. 단지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손은 지금 떨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함께 있었지만, 그녀는 혼자서 떨고 있는 듯했다.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것에 조금 화가 났지만, 이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 것 아닌 것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조금 뻗었지만, 내 손이 그녀의 손에 닿으려 할 때쯤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배고프네요, 우리 밥 먹지 않을래요?"

 

근처에서 밥을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과는 다르게, 그녀는 다시 안암으로 가자 했다. 먼 길을 다시 간다는 것이 귀찮았지만, 그녀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 그녀가 말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다. 여러 교통편을 거친 후 안암에 도착해서 안암역 1번 출구로 나왔다. 그녀가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동안, 내 지갑을 열어보았다. 어제 책을 산 영수증과 함께 오천 원이 들어있었다. 어제 책을 사느라 지출이 컸던 것이 기억나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돈이 별로 없다고 말을 했더니, 그럼 저렴하게 고른 햇살에 가서 밥을 먹자고 했다. 그 정도면 내 지갑 사정도 어느 정도 괜찮을 것 같아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걸어가니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저녁시간이라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다. 20분 정도 기다린 후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메뉴를 이야기하다 마침 둘 다 치즈를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어 치즈 라볶이 한 개와 참치김밥 하나를 시켰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있었는데, 우리의 대화 화제는 자연스럽게 방금 다녀온 보육원에 대한 것으로 흘러갔다.

 

"그 아이들은 왜 버림받았을까요?"

 

수저를 세팅하며 나는 별생각 없이 질문을 했다. 평소에는 수저 아래에 휴지를 깔지 않았지만, 왠지 그녀는 신경 쓸 수도 있을 것 같아 휴지를 두 장 뽑아 아래에 깔아놓은 후 세팅했다. 그녀는 이 주제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었는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말해주었다. 그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중심적으로 나에게 말해준 것은 부모의 능력 부족에 관한 것이었다. 부모가 아이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이 버려지고 부모를 잃는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보육원에서 자라는 것과 부모 아래서 자라는 것은 아이들에게 유의미한 차이를 가진다고 했다. 

 

"능력이 안된다면 낳으면 안 되죠.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데, 그런 생명을 무책임하게 방치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죠. 도덕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예요."

 

군대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고들을 보면서 생명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많았던 나는 그 안에서 나름대로 찾았던 답을 말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채 누군가의 생명의 불이 꺼진다는 것에 대해 너무나도 분개했었기 때문에 생명은 정말 소중하다는 생각을 했던 터였다. 주문했던 음식들이 나오고, 먹음직스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군침이 나왔다. 그녀 또한 배고팠는지 참치김밥을 먼저 젓가락으로 집었다. 그녀가 오물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미소가 절로 지어질 것 같았지만, 그녀가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제하려 노력했다. 

 

"그럼.. 만약 경제적으로도, 여러 방면으로도 형편이 되지 않는데 의도치 않게 아이가 생겨버린다면 그럴 때는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아이가 생긴 이상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나였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히 내 의사를 전달했다. 다른 생명에 간섭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으며, 피임을 제대로 해야 했어야 했고, 만약 아이가 생겼다면 그것은 제대로 피임을 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그 생명을 책임져야 하지 않겠냐고, 만약 그 책임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라고 그녀에게 내 뜻을 말했다. 그 후 뒤에 만약 정말 성범죄 피해자 같은 일방적인 피해자의 상황이라면 그것에 대해서는 확실히 대처할 방안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짤막하게 덧붙였다.

 

"생명은 소중하죠. 그런데 아까 말했듯이 서로가 불행한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 한다면.. 그게 생명을 위한 것일까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그녀의 질문에 오늘 본 보육원의 아이들이 생각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녀가 나에게 말해주었던 보육원 아이들에 대한 그녀의 감상이 떠올라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해도 결론이 날 것 같지 않아 짤막하게 그녀에게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한 후 식사를 마저 끝마쳤다. 치즈 라볶이와 참치김밥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더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서로 짤막히 조심해서 들어가라는 인사만 한 후 헤어졌다. 그 대화를 기점으로, 우리의 연락은 끊어졌다. 

 

"어머니, 어머니는 혹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아이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요?"

 

계속해서 연락을 받지 않는 그녀 때문에 신경이 자꾸 쓰였지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더더욱 답답했다. 겨우 기억을 짜내 마지막 만난 날 나누었던 대화들을 생각해냈다. 그 대화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 끝에 내가 했던 말에 문제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해서 되뇌어보았지만, 단지 의견 불일치로만 이렇게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화의 이면에 무언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던 주제에 대해서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둘이 식사를 하는 도중 여쭤보기로 한 것이 이 질문이었다.

 

"어휴, 말도 마라. 애 키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매일 울어대서 정신은 사납지, 뭐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어. 너도 얼마나 울어대던지, 아주 내 진이 다 빠지는 줄 알았다. 너 낳았을 땐 그래도 네 아빠가 죽어라 일해서 그나마 살만해서 그랬지, 돈까지 없어봐라. 애를 제대로 키울 수나 있겠니? 결국 다 불행해지는 거야. 어쩌겠니, 막말로 낙태하거나 애 낳아서 보육원에 보내지 않는 이상은 반드시 힘들 거야. 그런 불행한 삶을 사는 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

 

어머니는 끔찍하다는 듯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으며 이야기하셨다. 앞에 놓인 계란말이를 더 먹으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지만, 왠지 집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말이 확실히 옳았다. 아이를 힘든 상황에서 낳게 된다면 지난번 라볶이를 먹던 그녀와 어머니가 말했던 것처럼 모두가 힘들어질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라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럼 만약 낙태하거나 보육원에 아이를 보낸다면, 그 죄 없는 생명은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예요?"

 

어머니는 나에게 그 아이 또한 중요한 생명이라는 것을 말해주셨다.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던 말씀이 낙태나 보육원에 보내는 것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 또한 소중하지만 그 생명을 낳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태아나, 이를 낳는 여자나, 함께 책임져야 하는 남자에게도 각자의 삶이 존재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더 이상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했던 말들은 모두 태아에 집중된 말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 이면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무시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머리를 때렸다. 

 

"그러고 보면 엄마도 너 낳지 않았으면 하고 싶은 게 참 많았어~"

 

어머니는 추억을 회상하시는 듯 턱을 위로 뻗었다. 어머니가 자신이 처녀였을 적의 이야기를 해 주기 시작하셨는데, 어머니도 꿈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대학 교수가 되어 폼나게 살고 싶었다고, 공부를 해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 모든 꿈들을 나를 낳음으로써 포기하셨다고 했다. 그 순간 그녀가 애기능 벚꽃 아래서 읽고 있던 책이 떠올랐다. [데미안]. 싱클레어가 영혼의 인도자를 만나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 그녀는 왜 자아를 찾고 싶어 했을까 생각했다. 자아를 찾겠다는 것은 사실 대학생들의 흔한 생각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 책을 몇 번이고 읽고 있었다. 그만큼 간절했다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너 맨날 요즘 어딜 그렇게 가냐?"    

 

애기능을 하루에 몇 번씩 들르게 된 지도 2주 정도가 지났다. 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그녀를 보지 못했다. 틈만 나면 사라지는 날 보며 갓 제대한 과 동기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어보곤 했다. 자세한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영혼 없이 웃으며 애기능 캠퍼스 쪽 식사가 맛있어서 그쪽으로 식사하러 가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우리는 문과 캠퍼스에서 수업을 들었고, 이과 캠퍼스까지 가는 것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친구는 다녀오라는 말만 하고 절대 따라오지는 않았다. 지난 2주 동안 애기능을 가는 동안 벚꽃은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꽃잎들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드디어 앙상한 가지밖에 남지 않은 애기능에 그녀가 올 것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벚꽃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서요."

 

내가 3주째 애기능에 갔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귀에 상당히 익은 목소리였는데, 목소리는 흡사 화사하게 모든 꽃들을 휘날리고 앙상한 나무가 말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보았는데, 그토록 내가 찾아 헤매던 사람이 내 눈 앞에 서 있었다. 지난번의 미안한 감정과 드디어 만났다는 기쁜 감정이 뒤섞여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왜 매일같이 애기능을 오느냐고 물었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단지, 보고 싶다는 말 뒤에 미안하다는 말 또한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사과를 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나에게 말을 꺼냈다.

 

"우리, 술 마셔본 적 없죠?"

 

그녀가 이런 질문을 던진 후, 나는 다시 그녀가 가자는 곳으로 발걸음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가지는 않았다. 조용히 그저 그녀가 가는 발자취를 천천히 따라갔다.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을 때, 밖을 보았더니 석양이 망막에 맺혔다. 문득 지난번 다리에서의 그녀가 떠올라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그녀가 지금 옆에 없었더라면 더욱 착잡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지하철 역에서 내려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사서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겼다. 그녀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고 했는데, 맥주 두 캔 정도까지는 괜찮다고 

했다. 바쁘게 다리를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지난번 오렌지 주스를 마셨던 다리에 도착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석양이 예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 사실은, 여기서 세상과 연을 끊으려고 했어요."

 

다리 위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말하는 그녀의 고백에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내 눈에 비친, 노을을 배경으로 한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노을처럼 그녀의 삶 또한 막바지를 향해 달렸었다는 사실은 석양의 아름다움을 퇴색시켰다. 그녀는 다시 내 옆에 와 앉더니 맥주 한 캔을 따 홀짝 들이켰다. 예전 자신은 목숨을 끊으려고 한 적이 있는데, 석양이 너무 예뻐서 차마 몸을 던질 수 없었다고 했다. 단순한 감상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고, 사라지기 전 노을은 저렇게 아름다운데 사라지기 전의 자신이 너무 초라한 것이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가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라고 그녀는 맥주를 계속 홀짝대며 나에게 설명해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자세한 정황을 모르고 위로하는 것은 되려 기만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자세한 내막을 들은 후 진심을 다해 위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 위에서의 그녀는 자세한 사실은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저녁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다행히 오늘은 아무런 스케줄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은 시간이 빈다고 그녀에게 말하자, 정말 미안하지만 안암으로 다시 가 줄 수 있겠느냐고 나에게 물어왔다. 

 

"혹시 애기능이 왜 애기능인지 아세요?"

 

맥주 몇 캔을 더 사서 벚꽃잎이 다 떨어진 쓸쓸한 나무만 남은 애기능에서 둘이 나란히 앉아있을 때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평소에 애기능을 자주 오긴 했지만, 그 이름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뜻에 대해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단어 그대로 본다면 애기, 즉 아기의 능, 아기의 무덤이라는 말이었다. 그 생각을 그녀에게 전하니 그녀는 반은 맞았다고 했다. 

 

"조선시대 때, 왕자나 공주의 태반이나 탯줄을 보관하던 항아리가 있었어요. 그 항아리가 이 부근에서 발견됐기 때문에 이 곳을 애기능이라고 부른다고 하더라고요. 정확히 말하면 아기의 능은 아니고, 태의 능이라는 거죠. 그만큼 태반이나 탯줄은 성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녀는 약간 취기가 오른 듯 뺨이 벚꽃으로 피어올랐다. 연분홍빛 그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번에 말씀하신 생명의 소중함부터, 제가 얼마나 생명을 소중하게 대하지 않았었는지 말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알게 된 이후로 자꾸 애기능으로 발길이 향하더라고요. 슬픈 기분이 들어도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이곳에 와 있었어요."

 

생명을 소중히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나는 무슨 말인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보육원 봉사를 했다는 사실로부터 무엇인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혹시..'라며 말을 꺼내자, 그녀의 입에서 내가 예상했던 말이 나왔다.

 

"네. 저는 낙태를 했어요. 예전 남자 친구와 사귈 때 피임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생긴 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정말 괴로웠어요. 저도 제 삶을 살고 싶었는데, 우연히 마주친 이 상황 때문에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그래도 사실 형편이 됐다면 어떻게든 낳고 키웠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경제 사정, 그리고 남자 친구의 무책임함 때문에 저 혼자서는 도저히 키울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녀가 캔을 살짝 흔들더니, 맥주가 다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는지 봉지 안에서 맥주를 꺼내 한 캔 더 땄다. 

 

"낙태를 하고 나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단순한 생각이라면 좋았겠지만 대부분은 내가 생명을 죽였다는 트라우마와 아기에 대한 미안함이었어요. 그리고 덤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다는 외로움까지도요. 끝없는 합리화의  연속이었어요. 어쩔 수 없었다, 내 삶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라고요. 그런데 이건 간단히 합리화가 되는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아까 그 다리에서 정말 미안하다고,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던 것 같아요. 나쁜 엄마라 정말 미안하다고요. 결국 이 죄책감은 지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잊으려는 행동을 포기했죠. 이 죄를 짊어지고 가야 한다고 받아들였어요.

 

나는 가방 안에서 데미안을 꺼냈다. 왠지 그녀가 읽고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끝없는 고통 속에서 그래도 자신의 삶을 보고 싶어 하는 그녀의 생각이 고스란히 행동으로 드러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 책은 그녀에게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내가 꺼낸 데미안을 보더니 살짝 웃었다.

 

"그 책을 통해서 정말 위안을 많이 받았어요. 위안이라기보단, 그래도 나 자신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받아들이고 일부러라도 밝게 살려고 노력했어요. 그 아이의 몫까지라도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져야겠다고 생각하면서요. 그래서 보육원 봉사도 시작했죠. 갈 길 잃은 어린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찢어질 것 같더라고요. 그래도 제가 피하지 않고 마주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로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살짝 맺혀있었다. 어두컴컴한 밤이었지만 그녀의 뺨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많은 고뇌와 죄책감이 담긴 눈물일까, 생각하며 조용히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저한테는 어떻게 하실 마음이 드신 거예요? 쉽지 않으셨을 텐데."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낙인이 찍히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녀의 용기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왜 나에게 말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사실 말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아니, 못했다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죠.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모든 걸 말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저는 굉장히 기뻤어요. 왜냐하면 저를 그토록 따뜻하게 보는 눈빛은 정말 오랜만에 봤거든요. 대화를 하기 전부터 절 보고 계셨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저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마음에 위안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이 사람이라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했었어요. 그래도 사실 처음에 제가 먼저 말을 걸 때 큰 용기가 필요했었어요. 다행히 제 말을 받아주셔서 한시름 놨었죠.  그리고 몇 번 함께하면서 이 사람이라면 정말 괜찮은 사람 아닐까, 하고 기대하곤 했죠."

 

나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괜스레 애꿎은 벚꽃잎만 만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고른햇살에서 그녀의 예상과는 다른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 또한 들었다.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조금 더 조심스럽게 말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연락을 받지 않은 건 죄송해요. 그 날 대화에서 저는 역시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 날 화가 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단지.. 제 자신이 그냥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구멍에 쏙 도망쳐 들어갔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계속해서 짧지만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들이 떠올랐어요. 혹시나 애기능에서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이 든 게 어젯밤이었어요. 그래서 오늘은 한번 가 보자고 생각이 들어서 지금 이 곳으로 왔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녀가 내 연락을 받지 않은 것에 대한 내 짐작이 어느 정도 맞아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유일하게 나에게 문을 열어주었는데, 내가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를 보니 그녀는 이내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고 있었다. 내가 잠시 지켜보고 있다 그녀의 팔을 톡톡 건드리자 그녀는 눈물자국이 남은 채로 날 쳐다보았다.

 

"그 날 연락이 끊긴 뒤로, 제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해 봤어요. 그 날 제가 했던 말들에 대해서요. 고민도 많이 해 보고, 답이 나오지 않는 것들은 어머니께 여쭤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와 이야기하면서 참 많은 것들을 배웠어요.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제가 얼마나 경솔했는지에 대해서도 많이 느끼게 됐어요. 정작 중요한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 앞에 있는 사람처럼 힘든 사람도 있다는, 그 이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챘어요. 생명은 소중하죠. 그런데 우리도 사실 모두 생명이잖아요.  둘 중 어떤 생명을 선택해야 할지, 그것은 너무 가혹한 과제가 아닐까요? "

 

날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서는 금방이라도 울 것이라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아마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절대 겪을 수 없는 그런 고통이지만, 겪을 수 없다고 해서 겉핥기 식 위로를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와 똑같은 각도에서, 내가 그 상황이면 어떨지에 대해서 함께하고 아픔을 나누고 싶었다.

 

"그동안 혼자서 너무 고생 많았어요. 당연히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남성 또한 책임을 졌어야 하는데, 당신에게만 모든 짐을 지워서 정말 미안해요. 혹시나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옆에서 최대한 도와드리고 싶어요."

 

다 떨어져 버린 벚꽃 위에서 나는 그녀에게 내 속마음을 전했다.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로 내 눈을 뚫어지게 보았다. 눈망울에는 눈물이 다시 맺혀있었다. 이내 눈물은 그녀의 연분홍빛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애틋해서, 그리고 대견스러워서 나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녀가 내 품 안에서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을 때, 나는 말없이 그녀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이 작은 등으로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잠시 후 고개를 살짝 들더니 나에게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입술이 따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뜻한 그녀의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 후로도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를 안아주고 있었다. 꽃잎이 다 떨어져 볼품없이 앙상해진 벚나무가 우리 뒤를 지키고 있었지만, 이 벚나무 또한 다시 꽃을 아름답게 피워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또한 다시 아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게 네가 만든 거야? 대단하네!"

 

어느덧 내가 보육원 봉사를 시작한  1년이 지났다처음에는 마음을  열지 않던 아이들도 이제는 마음을 열고 나와 조금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오늘은  아이가 직접 만든 장난감을 나에게 보여줬는데놀라울 정도로  만들어져 있어 나를 놀라게 했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휴대전화를  보니 그녀에게서 연락이  있었다.

 

[여기 너무 예쁘지?]


 유럽의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하여 그녀를 찍은 사진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그녀는 그동안 나와 함께 보육원 봉사를 하다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며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유럽의 아이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며 관광도 하며 보육원들을 돌아볼 계획이라고 했다봉사가 끝난  커피  잔을 사서 애기능 벚나무 아래에 앉았다벚꽃이 흩날리는 모습이 보였다꽃잎들이 자유로운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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