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틀린 사람이었다

나르시시스트의 이중구속

by 김자옥

회사의 시스템에 불편함이 있었다. 난 제안하고 싶은 아이디어가 있었지만 망설였다. 초반에 번거로움이 있어 팀원들이 반기지 않을 것 같았다. 난 먼저 P에게 의견을 물었다. P는 “회의 때 얘기해 봐. 얘기는 자유롭게 할 수 있잖아”라고 했다. 난 회의에서 부담 없이 의견을 냈고 상부에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P는 회의실을 나오며 말했다. “다들 그거 아니어도 바쁜데…. 너무 개인 성과만 생각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난 어리둥절했다.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하루는 P의 생일이었다. 생일자가 있는 날엔 팀원이 다 같이 점심을 먹었는데 난 P에게 원하는 메뉴가 있는지 물었다. P는 답했다. “너희 먹고 싶은 거 먹어. 난 뭐든 상관없어.” 팀원들과 상의 후 베트남 음식점으로 식당을 정했다. P는 그제야 말했다. “아, 나 지난주에도 먹었는데. 근데 뭐 상관은 없어.” 그럼 다른 걸로 하자는 말에도 P는 끝까지 괜찮다고 하더니 막상 식당에서 음식이 나오자 P는 물린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식사 내내 신경이 쓰였다.


당시엔 몰랐다. 이런 게 사람을 조종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는 걸. 알고 보니 A의 전남편도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A 부부는 이사를 해야 했다. A는 남편에게 어느 동네가 좋을지 물었고 남편은 “당신 편한 데로 해. 난 어디든 상관없어”라고 했다. A는 자기보다 회사가 먼 남편의 출퇴근을 고려했다. 그러자 그는 어차피 지금도 멀다며 한 명이라도 편한 데가 낫지 않겠냐고 했다. 그러곤 이사에 관해선 아예 A에게 전담했다. 자기는 신경 쓰지 말라며.

A는 혼자서 여기저기 부동산을 왔다 갔다 하다 한 집이 마음에 들었다. 계약 전 남편이 한 번은 봐야 할 것 같아서 동네와 단지 명을 말하고 같이 가보자고 하자 남편은 지도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내 생각은 전혀 안 하는구나. 하긴 나만 죽어나면 되지 뭐.” A가 당황스러워 그럼 원하는 데를 말하라고 하자 그는 또 이랬다. “아니야. 내가 뭐가 중요해.”

서로 상충하는 메시지를 전하며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비난이나 불만을 드러내는 걸 이중구속(Double bind)이라고 한다. 즉, 이중구속은 ‘무엇을 해도 틀린 사람’으로 만드는 관계 속 덫이다.

어느 TV 프로그램에 나온 한 엄마는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야 뛰어나단 소리를 듣는다며 다 큰 딸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딸이 일로 정신없이 바빠지자 엄마는 이번엔 왜 자기 몸을 안 챙기냐며 야단했다. 전형적인 이중구속이었다.


이런 이중구속은 가정뿐만 아니라 조직 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상사가 직원들에게 뭐든 자유롭게 얘기해 보라면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면 탐탁지 않아 하거나 심지어는 불이익을 주는 일은 대표적인 이중구속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미란드 프리슬리(메릴 스트립)는 앤디(앤 헤서웨이)에게 불가능한 과제를 주고 실패하면 무능하다고 비난하면서 성공하면 더 어려운 과제를 준다. 어떻게 해도 앤디는 상사를 만족시킬 수 없다. 결국 이중구속은, 노력해도 인정받을 수 없게 만드는 조작의 기술이다. 상대는 더 열심히 하지만, 점점 더 길을 잃는다.


나르시시스트가 이 이중구속을 잘한다. 배우자가 외모를 꾸미지 않으면 “좀 꾸며라. 얼굴이 그게 뭐야”라고 하고, 그래서 꾸미면 “뭐 한다고 그렇게 꾸며”라고 한다. 어느 땐 몸매 좀 신경 쓰라며 다이어트를 하라고 하곤 음식 조절을 하면 그렇게 먹으니까 맨날 아프다고 하는 거 아니냐며 핀잔을 준다. 이래도 비난, 저래도 난리이니 어쩌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중구속을 하면 자신은 언제나 승자의 위치에 있게 된다. 상대방은 이들이 보내는 엇갈린 신호를 보며 계속해서 추측하게 되고 예측 불가능한 반응 때문에 더 노력하게 된다. 늘 이겨야 하고 남보다 우월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하는 나르시시스트에게는 퍽 매력적인 방법이다.


외현적 나르시시스트는 주로 공격적으로 지시하고 공개적으로 비난한다. “이걸 뭘 물어봐. 이 정도도 혼자 못해?” “누가 혼자 결정하래!” 상대는 뭘 해도 ‘못난 사람’이 된 듯한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반면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는 애매모호한 표현이나 돌려 말하며 혼란을 유도한다. 이들은 말로는 “난 괜찮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면서도 표정이나 눈빛 등 비언어적 신호로 불만을 표시해서 신경이 쓰이게 한다. 뭐든 상관없는 것처럼 하곤 “난 항상 너 먼저 생각하는데 넌 늘 너만 생각하더라”라며 죄책감을 심어준다. 원하는 걸 말하지 않고는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면서”라고 해서 생각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정확히 말을 해달라고 요구하면 “모른다니 정말 실망이다”라며 무심함을 탓한다.

외현형은 윽박으로 위축하게 한다면, 내현형은 미묘한 신호로 자책하게 만든다.

방식은 다르지만 목표는 같다. 상대의 자존감을 흔들고, 통제력을 쥐는 것.


이중구속은 상대방에게 큰 심리적 스트레스와 불안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든다. 심한 경우엔 정신분열증으로도 발전할 수 있다. 실제로 그레고리 베이트슨과 그의 연구팀은 1956년에 ‘정신분열증을 향한 이론(Toward a Theory of Schizophrenia)’이라는 논문에서 이중구속 이론을 제시하며 조현병(당시 용어로는 정신분열증)의 발병 원인 중 하나로 설명했다.


나르시시스트가 이중구속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통제 욕구다. 헷갈리는 메시지를 계속 던져줌으로써 상대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모호한 표현으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의미를 바꿀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세 번째는 자신 안의 모순과 결핍을 상대에게 투사하며 괜한 상대 탓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은 자신도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중구속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서는 이들의 패턴을 아는 게 중요하다. 어차피 정답이 없다는 걸 알면 이들의 말에서 한 걸음 물러날 수 있다. 다음은 이들이 원하는 걸 추측하려 애쓰는 대신 직접 묻는 게 좋다. 상대방이 명확히 말하지 않은 것은 책임지지 않는 태도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감정이 흔들려선 안 된다. 결국 이들은 감정을 흔들어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그 틈에 조종권을 쥔다. 그러니 가장 먼저 할 일은, 내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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