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팀장은 ‘하아, 또 뭔데?’ 하는 눈빛으로 고개만 겨우 비틀어 날 올려다봤다. 내 표정에서 결연함을 느꼈는지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향했다.
나는 준비한 사직서를 내밀었다.
“저 그만두겠습니다.”
순간 팀장의 눈이 흔들렸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하얀 봉투에 손을 뻗어 내용물을 확인한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잠시 둘 사이엔 긴장의 적막이 흘렀다. 팀장이 입을 열었다.
“내가 좀 말을 심하게 한 면이 있긴 한데, 그렇다고 뭐 나가라는 뜻에서 한 말은 아니었고….”
그의 표정은 기분 나쁘게 오묘했다. ‘굳이 이럴 거까지는’ 하는 약간의 미안함, ‘어라? 제 발로?’하는 비열한 반가움, ‘진작에 내 말을 잘 듣지. 그럼 이렇게까진 안 됐지’ 하는 가벼운 우월감이 한데 섞여 있었다.
묘한 그의 표정 덕에 잠시나마 ‘잘하는 건가?’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오히려 후련한 마음이 되어 이왕 이렇게 된 거 난 확실히 해 두고 싶어졌다. 내가 나가는 건 전적으로 ‘당신’ 때문이라는 걸.
“그날 하신 말씀 하나 때문에 그만두려는 건 아니고요. 그동안 팀장님을 죽 겪어오면서 이젠 한계가 온 것 같습니다.”
“야! 나는 뭐 너랑 일하고 싶은 줄 알아? 넌 뭐 잘했어?”
“제가 뭘 잘못했나요?”
“이거 봐, 이거 봐! 이게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야?”
“팀장님부터 돌아보세요. 아랫사람에게 어떻게 하시는지. 반말은 기본이고 기분 나쁘면 막말도 서슴지 않으시잖아요.”
“네가 먼저 잘했어 봐. 내가 그러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좀 애 같은 면이 있고 기분이 오락가락한다’ 정도로만 생각했지 이렇게까지 형편없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 사직서를 이제야 내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번 달까지만 출근하는 걸로 마무리 짓고 회의실은 나오는데 허탈감과 씁쓸함이 몰려왔다. 내가 고작 이런 사람 밑에서 참고 견디며 일해왔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사직서에 적은 사직사유가 생각났다. ‘상사의 폭언’이라고 쓸까 하다 그냥 ‘개인 사정’이라고 적은 게 뒤늦게 후회됐다. 예상되는 분란도 피곤했고, ‘그래도 상산데’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주자 했는데 괜한 오지랖이었다. 피곤하더라도 증거를 명확히 남겼어야 하는 건데.
이런 정도의 사람이라면 지금 바로 회의실을 나가면 여기저기에 “나한테 한 번만 봐달라고 싹싹 비는 걸 내가 매몰차게 차버렸어”라며 거짓을 보태 허풍을 떨 게 분명해 보였다. 배려는 이런 데 쓰라고 있는 게 아닌데.
자리로 돌아와 파일 탐색기를 열었다. ‘어차피 이렇게 나가는 거 망설일 게 뭐 있어.’ 여차 하는 순간을 대비해 모아둔 팀장과의 대화 목록 파일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메일 열고 해당 파일을 첨부하고, 받는 이에 이사 이름을 넣었다.
이제 내용을 입력할 차례. ‘이사님 안녕하세요.’까지 빠르게 적고 손가락을 멈췄다. 어쩐지 똑같은 인간이 되는 것 같았다. ‘이걸 보내서 내가 얻는 이득은?’ ‘어차피 나가면 그만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메일은 다시 닫았다.
퇴사까지 팀원 중 누구도 내게 퇴사 이유를 묻지 않았다. 퇴사 이유는커녕 내게 말을 거는 이도 없었다. 불필요한 오해라도 살라 눈길조차 피하는 눈치였다. 영서는 물론 박 선배마저도. 선배 입장에서 형식적으로라도 한 번쯤은 물을 법도 한데.
고대 아테네엔 ‘도편추방제’라는 게 있었다. 시민들이 깨진 도자기 조각에 추방했으면 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투표하고, 뽑힌 사람을 국외로 추방하는 제도였다. 국가에 해가 될 사람을 미리 제거하자는 취지였지만 예상되는 바와 같이 나중엔 주로 정적이나 그저 소문과 이미지가 안 좋은 사람 등을 적어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쫓겨난 사람은 억울했다. 그렇다고 남는 쪽이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은 잠시일 뿐. 잘못하면 언제든 자신도 추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따라다녔다. 사회 전체에 긴장감과 서로 간의 불신이 퍼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지난 시대의 단순하고 어리석은 제도 같지만 2000년대인 지금 여기에도 존재한다. 모습만 조금 달라졌을 뿐.
팀원들은 당장은 팀장 편에 서서 다 같이 나를 멀리하는 게 유리하게 느껴지겠지만 내가 나가고 나면 판도는 달라질 게 분명했다. 같은 편인 것 같던 팀장은 “봤지? 누구든 내 맘에 안 들면 똑같이 될 줄 알아!”라며 태도를 달리할 것이고, 팀원들은 슬슬 불안해질 것이다. 부당한 일이 있어도 말 한마디 하기 어려워질 게 뻔하다. 게다가 다 같이 따돌림에 동조했으니 서로 떳떳하지 못할 터. 매사 의심이 들겠지. ‘혹시 뒤에서 나 모르게 내 얘기하고 있는 거 아냐?’ 해봤으니 더 불안하겠지.
내 예상이 적중했음은 정확히 3개월 후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