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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어쩔 수가 없다

by 김자옥

영서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머리가 멍했다. ‘이거 꿈 아니지?’

박 선배는 늘 조용한 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설령 그게 자신에게 불합리한 일이라도 나서는 법이 없었다. 아, 물론 뒤에서 우는 소리를 하긴 했다. 그래서 가끔은 다른 사람이 대신 나서 주는 적도 있었다.


박 선배는 내가 따돌림을 받을 때도, 사표를 낼 때도 모른 척 조용했다. 일부러 그러는지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지 속을 알 수 없었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르게 사람이 좀 의뭉스럽게 느껴졌다. 겉으로 보이는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면 뒤에 뭔가 다른 모습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가끔씩 ‘뭐지? 이 사람’하는 순간이 있었다. 예를 들면 특별히 어필이 필요한 순간이 아닌데도 “일을 내가 여기서 젤 잘하니까” 같은 말을 불쑥 그것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거나, 누가 봐도 질투다 싶게 누군가의 시시콜콜한 허점을 대단한 결점인 듯 말할 때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퇴사 후 생각할수록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팀장이 굳이 나서서 팀원들 사이를 이간질한 것도, 팀장 한 마디에 다들 돌아섰다는 것도. 오늘 영서 말대로라면 이 모든 일의 중심에 박 선배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뒤통수를 이렇게 맞나.


‘지잉~’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영서다.

“근데 박 선배는 왜 그랬을까? 혹시 그때 그 일로 네가 자기를 공격했다고 생각한 걸까?”

“그게 무슨 공격이야. 일 얘긴데. 게다가 내가 뭐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언젠가부터 박 선배가 업무 분담을 새로 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책임도 스트레스도 적은 일을 맡겠다고 했다. 나를 포함한 팀원들은 반대 의사를 조심스럽게 밝혔다. 박 선배 말대로 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부담이 클 거라고. 지금 인원으로는 현재 방식이 더 나을 것 같다고. 박 선배는 수긍하는 듯했다. 딱히 우리를 설득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 선배가 말했다.

“이제부터 전에 내가 말했던 대로 업무 나누기로 했어. 팀장님도 허락했어.”

다들 할 말을 잃은 채 표정이 굳자 박 선배는 “일단 해보자.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원래 대로 하면 되지.”




업무를 변경하고 두어 달이 지났다. 그동안 일은 쏟아져 들어왔고 하루하루를 버티다시피 지냈다. 하루는 영서가 더는 안 되겠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야? 네가 박 선배한테 얘기 좀 해봐.”

영서는 이럴 때면 꼭 나를 앞세운다. 내키지 않았다.

“얘기할 거면 다 같이 하는 게 좋지 않아?”

“여럿이 한 사람에게 얘기하면 박 선배 입장에선 공격하는 걸로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영서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나와 박 선배는 소회의실에 마주 앉았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지금 이 방식은 업무 진행에 무리가 있는 것 같다고. 다시 전처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박 선배는 얼굴이 굳었다.

“너희만 힘든 게 아니야. 나도 되게 힘들어.”

“선배가 편하다는 얘기가 아니고요. 일이 계속 한쪽으로 몰리니까 업무를 나누지 말고 원래대로 다 같이 하자는 얘기예요.”

박 선배는 분명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애써 아닌 척, 당당한 척했다. 하지만 울그락불그락해진 얼굴색만은 숨길 수 없었다.

“내 일도 많아. 너희들이 몰라서 그렇지.”


박 선배는 진실을 마주하기보다 자기 방어에 집중하는 듯했다. 선배에게 내 얘기는 전혀 가 닿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박 선배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몹시 불편한 듯 시선을 어디 한곳에 두지 못한 채 눈동자가 산만하게 움직였다.


회의실엔 무거운 침묵이 낮게 가라앉았다. 박 선배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여는 사람처럼 흐린 목소리로 말했다.

“뭐 생각은 해볼게. 근데 내 일도 만만치 않게 많아.”

‘아니. 그러니까 그런 말이 아니라…’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더 설명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오해해서 듣기로 작성한 사람 마음은 돌릴 수 없는 법이다.


그날 박 선배는 하루 종일 말이 없었다. 아니 그날부터였다는 게 정확하려나. 원래도 좀 뚱한 면이 있었지만 확실히 더 한동안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신경 쓰지 말자. 내가 뭐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라며 마음을 다스렸지만 아무래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여럿이 같이 말할 걸 그랬나. 아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어쨌든 일이 해결됐으면 됐지 뭐.”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간 일이 지금 이 사태를 불러왔다는 말인가? 고작 이런 걸로? 영서 말대로 박 선배는 내가 자기를 공격했다고 생각한 걸까. 그래서 그런 헛소문을? 설마. 말이 안 된다. 이거 말고 다는 뭔가가 더 있겠지. 아니 있어야 한다. 이럴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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