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자꾸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옆 부서에 노 이사가 새로 왔을 때다. 스카우트되어 온다는 노이사는 출근 전부터 회사의 기대가 컸다. 전 회사에서도 노 이사만 바라보고 있는 거래처가 몇 십 군데는 된다면서 우리 회사로 오기만 하면 그 거래처들이 전부 따라올 거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요란한 소문이 무색하게 노 이사의 활약은 너무나도 보잘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수군댔다.
“거래처가 있긴 했던 거야? 자기가 허풍 친 걸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믿은 거 아냐?”
노 이사의 입지는 빠르게 좁아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난데없이 노 이사는 우리 팀 그러니까 일본어 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유는 하나. 본인이 일본어를 ‘좀 안다’는 것이었다. 노 이사는 우리 팀에서 나가는 서신을 보고 싶다며 샘플을 보내 달라 했다. ‘아니 왜 남의 부서 일에. 이건 월권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팀장은 “보내 줘”라며 해맑았다.
샘플을 받은 노 이사는 서식이며 고정 문구 심지어 글자체까지 하나하나 지적하고 나섰다. ‘아니 뭘 이런 걸 트집 잡나’ 싶었지만 짧은 생각이었다. 진짜 권력은 언제나 사소한 걸 쥔 사람에게서 나온다.
하지만 팀장은 생각이 다른 듯했다.
“노 이사가 해달라는 대로 해줘. 어려운 거 아니잖아?”
마치 깨진 유리창처럼 이미 생겨버린 구멍으로 노 이사는 이제 거침없이 손을 집어넣고 휘저었다. 여길 고쳐라 뭐는 빼고 뭐는 추가해라. 지시도 그때그때 달라 우린 몇 번이고 수정을 거듭해야 했다. 참다못한 팀원들은 팀장에게 하소연을 했고 팀장은 마지못해 최 이사 그러니까 우리 부서 이사에게 사정을 전했다.
최 이사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사실 노 이사를 데려오는 데 최 이사의 몫도 컸다. 직접 추천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찬성한 인물이니까. 그날 오후, 최 이사로부터 전체 매일(노 이사를 포함한)이 왔다. 서신 양식을 이 참에 아예 새로 고치자는 거였다. 나름 고심 끝에 내놓은 방안 같았다.
최 이사의 공지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서식을 어떻게 바꾸는 게 좋을지 각자 아이디어를 내라는 것이었다. 난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기존 서식은 불필요한 정보를 많이 입력해야 해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딱 필요한 정보 이를 테면 레퍼런스 번호만 남기고 다 삭제해도 업무에 전혀 지장이 없어 보였다.
샘플을 만들어 난 먼저 박 선배에게 보여줬다.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이래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글쎄. 메일 보내 봐.”
며칠 후. 내가 낸 의견은 채택되었고 앞으로 이대로 통일해서 나가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속으로 ‘아싸!’를 외치던 나와 달리 주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어딘가에선 한숨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알고 보니 의견은 나만 냈다. 딱히 채택이랄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날 점심. 박 선배는 팀원들 앞에서 말했다.
“바빠 죽겠는데 서식까지 고쳐야 해? 누구 땜에 귀찮게 생겼다.”
팀원들은 침묵으로 박 선배 말에 동의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난 난감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리둥절했다. 자리로 돌아와 나는 영서에게 카톡을 보냈다.
“새 폼이 더 편하지 않아? 기재할 것도 훨씬 줄었는데?”
“그렇긴 하지.”
그러면 그렇고 아니면 아니지, 그렇'긴' 하다는 건 뭘까. 모든 서신을 새 폼에 맞게 고쳐 놓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긴 하지만 일단 해 놓으면 그다음부터 일이 훨씬 수월해진다는 걸 모르나. 게다가 더 이상 노 이사가 서식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참견할 일도 없게 됐는데. 난 아무래도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문제는 한동안 나와 팀원 사이에 큰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박 선배가 무심코 “서식이 간단해지고 나서”라며 내 제안을 인정할 때까지. 사실 박 선배는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내가 뭔가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 알려주거나 아이디어를 내면 “굳이 그건 필요 없을 거 같은데?”라고 하곤 나중에 알고 보면 누구보다 잘 활용하고 있었다.
갑자기 지난 소소한 일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이것도 박 선배의 실체를 드러내는 하나의 단서가 되는 걸까. 그때부터 박 선배는 나름의 꿍꿍이가 있었던 걸까. 혹시 나와 팀원들 사이를 갈라놓을 생각도 그때부터?
영서의 "그렇긴 하지"란 말이 그제야 납득이 됐다. 박 선배 눈치를 보느라 솔직한 의견을 말하지 못했던 거다. 그렇다면 이건 박 선배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분위기를 따라가는 사람들, 눈치껏 대세에 편승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조직에서 가장 무서운 건 틀린 말이 아니라 옳은 말을 외면하는 침묵이다. 침묵은 가장 교묘한 박해다. 어쩌면 박 선배가 아니라, 입을 굳게 다물었던 그들이 나를 내몬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