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사건의 전말을 알고 더 괴로웠다. 겨우 잊었다 싶었는데, 오히려 잊지 못했던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땐 ‘됐다’ 하고 넘겼던 일들이 하나씩 기억 속에서 툭툭 튀어나왔다.
‘그때부터 다들 한통속이었나? 내가 뭘 잘못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잘못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파스칼의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마음…? 아니 이건 일이잖아. 일을 마음으로 하나. 그런데 자꾸 걸렸다. ‘마음’이란 말이.
혹시 내가 놓친 게 있었을까. 팀원들은 왜 침묵을 택했을까. 그들의 마음에는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었던 걸까
어느 날이었다. 회사는 새로운 실적제도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모든 일을 시간과 매출로 환산되는 방식이었다. 계산식은 난해했고 번역팀처럼 수치로 평가하기 어려운 부서엔 전혀 맞지 않았다.
난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 팀 일하고는 안 맞는 거 아닌가요?”
“위에서 정한 건데 따라야지 별 수 있어?”
팀장은 퉁명했다.
“크게 신경 안 써도 돼. 어차피 형식적인 거야.”
박 선배가 달래 듯 말을 보탰다.
“그럴 것 같진 않은데…”
팀장과 박 선배는 표정이 굳었다. 마치 그만하라는 듯. 다른 이들의 의견도 궁금했지만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회의실을 나오며 나는 영서에게 물었다.
“형식적인 걸 이렇게까지 한다고? 아닐 것 같지 않아?”
“그러게. 또 이걸 갖고 얼마나 사람을 잡으려는 건지. 보너스 줄이려는 꼼수 아냐?”
영서 말에 옆에 있던 지은이 끼어들었다.
“그러겠죠. 맨날 어떻게 하면 직원들에게 줄 돈을 아낄지 고민하잖아요.”
나는 반가우면서도 억울한 심정이 되어 물었다.
“아니 이게 우리 팀하고 맞아?”
“안 맞지.” “당연히 안 맞죠.”
둘은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형식’일 뿐이라던 실적제도는 아주 실체적으로 작동했다. 각자 하는 일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실적 프로그램에 기재해야 했고, 그 값은 팀별 개인별 비교의 수단이 됐다. 실적이 떨어진 분기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회사의 위기’를 들먹이며 자연스럽게 ‘보너스 감소’ 얘기로 이어졌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전에는 그냥 하던 일도 실적이 안 잡히는 일은 꺼리게 되고 누군가는 일을 더 가져가려 애썼고, 누군가는 은근히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그게 1시간씩이나 걸릴 일이야?”
“쟤만 실적이 너무 낮지 않아?”
시도 때도 없이 숫자가 따라붙으며 주변 공기는 점점 팍팍해졌다.
난 틈틈이 어필했다.
“이건 제도 자체가 문제 아닌가요?”
하지만 내 말은 어디도 받아주는 곳 없이 허공만 떠돌았다.
닭장에 오래 갇힌 닭은 저항할 줄을 모른다. 소설 <화이트타이거>는 카스트 제도 속 하인들을 닭장의 닭에 비유했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저항은커녕 주인에게 충성하고, 탈출 시도하는 이에게 제동을 건다. 회사의 실적제도가 바로 그런 닭장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기를 드는 일은 없었다. 그러긴커녕 알아서 갇히고 자기들끼리 감시하고 누군가는 주인에게 잘 보이려 충성까지 다했다.
통제 중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서로 알아서 경쟁하고 감시하게 하는 것이다. 난 당시 어쩌면 회사의 목적이 애초에 여기에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나눌만한 사람이 없었다. 우선 내 말을 이해할지 의심스러웠고, 돌아올 반응도 왠지 짐작이 되었다.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피곤하게.”
뭔가에 관해 골똘히 생각하다 어떤 결론이 났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전하면 흔히 돌아오는 대답이다. 그럼 난 무안해진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입은 어떻게든 닫겠는데 생각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내가 아무리 제발 멈추자 해도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돌아간다. 그러곤 기어이 다시 말을 꺼낸다.
“근데 그때 그거 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회사라고 다르지 않았다.
하루는 부서 회식이 있었다. 오랜만에 이사가 참석했고, 어쩌다 보니 우리 팀이 모인 자리에 앉았다. 술잔이 몇 번 오가더니, 이사가 꺼낸 말은 또 실적 얘기였다.
‘아, 그놈의 실적’
실적 얘기에 회식자리가 회의실 분위기로 바뀌었다. 좀 전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나는 못마땅했다.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이사님, 그런데요.”
나는 불쑥 입을 열었고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저희 번역팀은 그 실적제하고는 조금 안 맞는 것 같은데요. 저희는…”
긴장이 맴돌았다. 팀원들은 나와 이사 사이를 번갈아 보며 침울 꼴깍 삼켰다.
“아아, 번역팀은 크게 상관없지. 너무 신경 쓸 거 없어.”
내가 결의에 차서 따지듯 물은 것에 비하면 이사의 태도는 너무나도 가벼웠다. 거기에 얄밉게도 인자해 보이는 미소까지 장착했다. 팀원들은 뜻하지도 않은 결과에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다만 박 선배는 이사가 자리를 뜨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거봐, 내가 말했잖아. 신경 쓸 필요 없다니까.”
좀 웃겼다. 그래놓고 실적 얘기를 제일 많이 한 게 누구더라.
신경 쓸 거 없다던 이사는 얼마 후 다시 실적을 들먹였다. 팀원들은 아무 말 없이 자연스럽게 닭장 속 제자리를 찾아갔다. 나는 또 생각에 빠졌다. 그 인자한 미소는 뭐였을까. 이거, 나만 이상한가.
나중에 알았다. 나처럼 생각이 끝없이 파고들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 이름을 알고 나서, 모든 게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