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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옥 Oct 15. 2019

좀 뻔뻔했어도 되지 않았을까

아이가 8개월이 되었을 때 나는 아이를 엄마에게 맡기고 다시 회사를 나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를 엄마에게 맡기는 게 어떤 것이라는 걸 몰랐다. 아이를 맡긴다는 이유 하나로 내 존재가 없어질 거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 집과 친정집은 같은 수원이었지만 거리가 좀 있었다. 회사에 출퇴근하면서 매일 아이를 맡기고 찾아오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다. 엄마가 먼저 주중에는 엄마 집에서 데리고 있을 테니 주말에만 데려가라고 제안을 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 왔다 갔다 하는 게 만만치 않겠다 생각했는데 엄마의 제안이 고맙게 느껴졌다. 


어린아이를 친정에 두는 일은 몸은 편할 수 있지만 마음은 몇 배로 힘든 일이었다. 토요일에 아이를 데려와서 주말을 함께 보내고 다시 일요일 저녁에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향할 때면 발걸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아이가 엄마와 떨어질 시간을 알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엄마는 아이를 더 힘들게 한다며 뒤돌아보지 말고 빨리 가라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안아주고 달래주고 뽀뽀하고 또 안아주고 달래주고를 반복했다. 


아이가 조금 더 자라서 자기 생각을 갖고부터는 마음이 더 아팠다. 아이가 오히려 떠나는 나를 위로하는 게 느껴졌다. 나보다 더 씩씩하게 헤어지고 애써 괜찮은 척하는 모습이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하루는 아이가 할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했다.   


"난 눈물 나도 꾹 참을 거야. 엄마도 꾹 참잖아. 내가 울면 엄마도 울어."


아빠가 이 말을 듣는데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며 애가 너무 기특하다고 하셨다. 전해 듣는 내 가슴은 또 찢어질 것만 같았다. 



이런 힘듦은 오로지 나의 몫이었다. 아이를 맡기고 회사를 선택한 건 나였으니까. 주변으로부터 듣는 너는 애를 거저 키운다는 말, 애 신경 안 쓰고 회사만 다닐 수 있어서 좋겠다는 말, 심지어는 애보기 싫어서 회사 나간다는 말 등은 내가 다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이런 말들도 나를 힘들게 했지만 제일 힘든 건 엄마의 푸념과 짜증을 전부 받아내는 것이었다. 안다. 엄마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도 남았다. 잘 알기 때문에 엄마가 하는 말은 다 듣고 혼자 삭히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봐주는 건 너무나도 고마운 일이지만 엄마는 그만큼 모든 스트레스를 나에게 풀었다.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힘들지'라는 말밖에는. 

행여 엄마의 기분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아이가 눈치를 볼까 봐, 또는 더는 아이를 못 봐주겠다고 할까 봐 늘 노심초사했다. 


이런 내 입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의 짜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전화를 걸 때마다 손목이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는 말로 시작을 했고, 뭐만 있으면 애만 보느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을 모른다며 하소연을 했다. 건성으로 들으면 또 듣기 싫어한다고 언짢아하고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가 5살이 되면서 이사를 왔다. 더 이상 엄마 옆에 있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출근을 하고 퇴근하면서 아이를 데려오고, 집에 와서 밥 먹이고 씻기고 하느라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훨씬 편했다. 가끔씩 아이가 아프거나 유치원 선생님이 출근을 늦게 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일은 있었지만 그래도 견딜만했다. 


이런 생활도 잠시였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다시 돌봐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잠시 돌봐주는 아주머니를 구하긴 했지만 아이와 맞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가 너무 못 미더워했다. 엄마가 다시 오후에만 왔다 갔다 하기로 했다. 하루 종일 있는 게 아니니 예전과는 좀 다르겠지 했지만 큰 착각이었다. 또다시 시작이었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눈이 오면 눈이 와서, 햇볕이 뜨거우면 너무 뜨거워서 힘들다고 했다. 난 이제 날씨까지 챙겨봐야 했다. 이렇게 고맙지만 불편한 관계는 아이가 초등학교 2 학녀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이를 맡기고 나서 몇 년간 나란 존재가 없어진 듯했다. 나보다는 엄마의 기분, 엄마의 건강 상태를 살펴야 했고, 함께 살고 있는 아빠와 동생 눈치마저 봐야 했다. 물론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를 두고 누군가는 고마운 줄도 모른다고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다. 잘 알고 있다. 지금도 이런데 당시에는 오죽했겠는가. 엄마 때문에 힘들다는 말은 꺼낼 수도 없었다. 그저 속으로 끙끙 앓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이는 벌써 중학생이다. 그때를 돌아보면 다 고생이었지만 나는 내가 참 안쓰럽다. 불쌍하기까지 하다. 엄마는 엄마대로 힘이 들었고 아이는 아이대로 이 모든 게 영향이 갈까 봐 늘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회사일마저 바빴다. 잘 버텼다고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다.  



가끔은 그때를 생각하면 좀 뻔뻔했어도 되지 않았을까, 좀 이기적이었어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어차피 아이는 맡겼고 엄마가 힘든 건 미안하지만 내가 늘 미안해하고 주눅 들어 있고 눈치를 본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 것인가. 

엄마의 앓는 소리는 점점 늘어갔고 내가 봐야 할 눈치도 늘었다. 나의 멘탈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했다. 꼭 이렇게 살아야 했을까 싶다. 좀 떳떳하게 미안해해도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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