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에 공장이라도 있는 건지

by 김자옥

내가 잘못인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잘못한 게 없었다. 옳은 생각을 가지려 애썼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았을 뿐이고, 감정이 저절로 움직였을 뿐.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채 거의 1년 여가 흘렀다. 그래, 이제 그만 생각하자. 아무리 곱씹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렇게 마음을 놓으려던 어느 날이었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의 강의가 시작이었다. ‘소시오패스만큼 위험한 나르시시스트’란 제목의 유튜브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강의는 무척 흥미로웠다. 유튜브가 추천해 주는 비슷한 영상들을 빨려들 듯 섭렵해 갔다.

그때였다. 눈이 번쩍 뜨이고 심장이 뛰기 시작한 건.

"생각이 많고 예민한 사람 5가지 특징과 4가지 해결법 (정신적 과잉 활동인)”

정신적 과잉 활동인?! 여기에 해답이 있을 것만 같았다.

영상에서 말하는 것엔 대부분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디서도 꺼내지 못한 내 고민들이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댓글로 향했다.


“머릿속에 공장이라도 있는 건지 생각, 걱정 무한 생산이에요”

“간혹 주변에 생각을 털어놓으면 '엥, 굳이 그렇게까지 생각하냐, 너무 꼬인 거 아니냐'는 답이 돌아와…”

“다른 사람이 별생각 없이 툭 내뱉은 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나 같은 사람들이 또 있었구나. 다들 나처럼 힘들었구나. 가슴이 웅장해졌다.


더 알고 싶었다. 영상에서 참고 자료로 소개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책장을 넘길수록, 마치 누군가 내 안을 훔쳐본 듯했다. 그중 특히 프랑스 심리 치료 전문가 크리스텔 프티콜랭은 어찌나 명쾌하고 시원하게 얘기하는지. 게다가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나도 모르게 ‘이 언니 뭐야!’하는 감탄이 나왔다. 난 그의 책을 추적하듯 하나하나 읽어갔다.


정신적 과잉 활동인(PESM:Personnes Encombrées de Surefficience Mentale). 의학적 진단명은 아니었지만, 책 속 특징들은 너무도 정확히 나를 설명했다. 생각이 끝없이 많다는 것. 타인의 표정 변화에 민감하다는 것. 형식적으로 하는 인사치레를 이해하지 못 한다는 것. 이야기의 모순을 발견하면 참지 못한다는 것. 의미 없는 집단의 규칙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 달콤한 거짓말보다 쓰라린 진실을 선호한다는 것. 하나하나가 다 나였다. 소름이 돋았다.


책을 읽다가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나르시시스트에 관한 내용이었다. PESM은 나르시시스트의 타깃이 되기 쉽다고 했다. 공감 능력이 높고, 악의를 의심하지 않고, 상대를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박 선배가 떠올랐다. 강 팀장도. 설마… 그들이?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일단 나를 이해하는 게 먼저였다.


드디어 나를 설명하는 말이 생겼다. 누군가 내 고통에 이름을 붙여준 기분이었다. 몸은 계속 아픈데 어디서도 병명을 알 수 없다가 마침내 알아냈을 때의 감정이 이런 걸까. 나를 설명할 언어가 생겼다는 건 생각보다 큰 안도이자 위안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이 공허했다. 그동안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의심하며 버텨온 시간이 송두리째 허공에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나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그제야 그동안의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팀장의 실수가 유독 내 눈에만 보이고, 조직의 모순이 거슬려 참을 수가 없고,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대화에 정신이 혼미했던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틀려서도 아니고 그냥 난 그런 사람이었던 거다.


하지만 이 깨달음이 곧바로 위로가 되진 않았다. 오히려 질문이 더 생겼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왜 나만 이렇게 태어난 걸까. 아니, 태어난 걸까, 만들어진 걸까. 만들어졌다면 원인은? 이대로 살아도 되나. 고쳐야 할까. 고칠 수도 있나. 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이런 나로 행복할 수 있나. 그리고... 박 선배와 강 팀장은 정말 나르시시스트였을까.


'내가 잘못인 건가'에 이어 풀어야 할 새로운 과제가 내 앞에 펼쳐진 기분이었다. 이 답을 얻고 나면 내 인생은 새로운 길이 열릴 것만 같았다. 그 문 너머엔, 처음으로 나 자신을 이해하는 내가 서 있을 것만 같았다.


이름을 안다는 건, 존재를 증명받는 일과도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어쩐지 그 이름 안에 갇히는 기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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