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과잉 활동인이 직장에서 계속 부딪힐 때
회사를 옮겼을 때 나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전 회사는 가끔 직원들을 불러 모으기는 했지만 대체로 정해진 사안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소통은 일절 없었다. 하지만 이 회사는 달랐다. 회의를 자주 했다. ‘여긴 좀 말이 통하겠다. 적어도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일은 없겠네.’ 난 자유로운 의견 교환을 생각하며 앞으로 숨통이 트일 직장 생활을 그렸다.
부서 회의에서 부서장은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유롭게들 얘기해 봐요.”
조용했다. 아무도 의견을 내지 않았다. ‘왜 얘길 안 하지? 다들 할 말이 많았던 거 같은데.’ 내가 먼저 입을 떼었다.
“더블 체크가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담당자를 너무 믿어 주시는 건지 더블 체크가 좀 소홀해지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직설적으로 들리지 않게 살짝 농담도 섞었지만 아무도 웃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서로 눈치를 보며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더블 체크를 제대로 안 하나?”
부서장은 경직된 얼굴로 A팀 팀장을 향해 말했다. 앗, 얘기가 그렇게 되나. 순간 난 고자질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뭐, 어쩌랴. 사실은 사실인 걸.
A팀 팀장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요. 잘하고 있긴 한데, 어쩌다 누락된 게 있었나 봅니다. 확실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더 나은 방향을 찾고자 한 말이었지만 어쩐지 그들은 누가 잘못하고 있는지를 가려내는 데 포커스를 두고 있는 듯했다. 찜찜한 마음으로 회의실을 나오는데 영서가 말을 걸었다.
“야, 너 진짜 용감하다.”
“뭐가?”
“그냥… 나도 하고 싶은 말이긴 했는데 난 못하겠던데.”
“왜? 필요한 말인데.”
“그건 그런데… 아무튼 듣는데 속은 시원하더라.”
좀 이해가 안 됐다. 서로 의견을 나누려고 회의를 하는 거 아닌가.
이해가 안 되는 건 회의만은 아니었다. ‘브레인스토밍’이라고 불리던 팀 모임도 마찬가지였다. 팀원들은 주제도 모른 채 "일단 모여봐"란 한 마디에 회의실에 모여 앉았다. 팀장은 그 자리에서 “이러이러한 일이 있는데 이거에 관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견들 좀 내 봐”라고 했고, 아무 준비 없이 모인 팀원들은 쉽게 운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겨우 누군가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떨까요?”하고 물으면 팀장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걸 내가 생각 안 해봤겠어?”
뭘 말하든 심리적 안전감이 있어야 할 자리는 심리적 불안만 가득했다. 몇 마디 뻔한 얘기만 오가고 팀장은 잡다한 자기 얘기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팀원들은 적당히 호응했다.
난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이 시간이면 다른 일 몇 개는 했겠다.’ 한 번은 참다못해 팀장에게 말했다.
“아이디어를 구하시는 거면 미리 생각할 시간을 주시면 더 좋을 거 같아요. 각자 생각해 보고 이야기 나누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것 같아요. 갑자기 물으시면 생각도 안 나고…”
“미리 말하면 생각들은 하고?!”
아무래도 팀장은 팀원들의 의견을 들을 의향은 처음부터 없었던 듯했다. 팀장은 의견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팀장은 뭔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도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A안은 다 좋은데 이러이러한 게 걸리고, B안도 나쁘지는 않은데 뭔가 명쾌한 답은 아닌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팀원들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래도 A가 낫지 않나요?" "정 아니면 무난히 B로 가는 것도..." 난 알고 있었다. 결국 팀장은 자기 뜻대로 정할 거라는 걸. 다만 그가 얻고자 하는 건 "민주적인 리더" 이미지와 책임 분산이었다. 그가 구하고 싶었던 건 답이 아니라 면책이었다.
회사의 회의는 문제를 해결하는 자리가 아니라 팀장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의견을 듣는 자리가 아니라 형식적으로 묻는 자리였다.
많은 게 눈에 보이고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모습과 괴리가 클수록 회의가 점점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자리에 앉아 있는 내내 마음도 생각도 불편했다. ‘이럴 걸 뭐 하러 번잡하게 사람들을 불러 모으나. 그러지 않아도 바쁜데.’
문제는 회의에 그치지 않았다. 인간관계도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달랐다. 어느 날 박 선배가 실수를 했다. 고객에게 보낼 자료에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었다. 난 바로 말했다.
"선배, 여기 이 부분 빠진 것 같은데요. 보내기 전에 확인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나중에 얘기해야지 했다가 잊을 수도 있고, 문제가 되면 박 선배뿐만 아니라 회사도 곤란해질 터였다.
박 선배도 고마워할 줄 알았다. 하지만 선배는 "어? 그러네"하면서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난 영문을 몰라 나중에 영서에게 물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
"지적당해서 자존심 상한 거 아냐? 게다가 사람들 앞이었잖아."
"아니… 그걸 지적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냥 실수 발견한 거잖아.”
“그래도. 주위에 사람들이 있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해. 모른 척이라도 했어야 하나.
후배는 다를까 했지만 후배도 마찬가지였다. 한 후배에 관해 자주 말이 나왔다. 태도에 관한 얘기였다. 지각이 잦은 것도 다 같이 하는 일에 요리조리 빠지는 것도 주위에서 좋게 보지 않았다. 모른 척할까 하다가 아직 신입이라 잘 몰라서 그러겠거니, 알고 나면 생각을 달리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전했다.
“이런 말들도 나오니까 조금 신경 쓰면 좋을 거 같애.”
“누가 그런 말을 해요?”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전 중요해요. 구체적으로 누구예요?”
난처했다. 그리고 피곤했다. '고맙다'가 아니고 누가냐고? 한숨이 나왔다. 부끄러워하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정상 아냐? 어쩐지 현기증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도움이자 선의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당사자들에겐 단지 결점이 노출되는 일이 되고 나는 달갑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노력할수록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점점 회사도 사람도 모든 게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기대하는 게 그렇게 어렵고 힘든 일인가. 그냥 당연한 일 아닌가.
PESM(정신적 과잉 활동인)을 알고 나서야 나의 피로감이 이해가 됐다. 문제는 내가 아니었다. 내가 갖는 ‘이상향’이 문제였다. PESM은 이상주의 성향이 강하다. '이래야 한다'는 기준이 명확하고, 그 기준대로 행동하고, 남들도 그 기준에 맞게 판단한다. 나는 생각했다. 회의는 문제를 해결하는 자리여야 하고, 의견은 존중받아야 하고, 진실은 말해야 하고, 선의는 선의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하지만 세상은 그런 이상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회의는 자기 위상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자리였고, 의견보다 분위기가 중요했고, 진실보다 기분이 우선이었고, 선의도 조심해서 표현해야 했다.
나는 규칙을 몰랐던 게 아니었다. 내가 바라보는 이상향이 따로 있었고 그 기준은 꽤 높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를 계속 현실에 부딪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