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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옥 Oct 07. 2020

내가 누군지 알고

내가 너를 알아야 하니?

얼마 전 재밌는 기사를 접했다. 코로나 검사를 위해 경찰에게 동행을 요구받은 전 국회의원이 검사를 거부하며 "나 OOO이야.", "사람을 뭘로 보고. 내가 국회의원을 세 번을 했어"와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코로나 검사와 국회의원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내가 누군지 알고", "날 뭘로 보고"와 같은 말을 종종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인 중에도 있었다. 볼 때마다 의아했다. '사람들이 그가 누군지 알아야 하나?', '그냥 사람 말고 달리 뭘로 봐야 하나?' 자신은 굉장히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난 전혀 그럴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는 특별해 보이지도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안돼 보였다. 왜 저렇게 됐을까 싶기도 하고.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나르시시스트적인 면이 있겠지만 과하면 '감이 나한테'라며 아주 작은 일에도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낀다. 상대방은 특별히 의도한 바가 없는, 예를 들면, 전화를 못 받았다든지, 문자를 늦게 확인했다든지, 못 들어 대답을 못 했다든지 하는 행동에 분노한다. 그러곤 여지없이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고 한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다행이다. 혼자 분노하고 마는 것이니. 분노가 공격으로 바뀌면 복잡해진다. 주위 사람들이 다 피곤해하면서 슬슬 피하기 시작한다.      


이런 유형에 대해 <관계를 읽는 시간>에서 저자 문요한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들은 강한 분노 폭발을 통해 자신의 수치심을 빨리 태워버리고는 상대를 공격하고 통제한 데서 우월감을 느낀다. 심지어 공격받은 사람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겉으로 보이는 오만함과 달리 이들의 자존감은 무척 취약한 것이다.”     


자존감 낮은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을 강하고 크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살면서 때로는 강해 보여야 할 때도 있겠지만 늘 필요 이상으로 강해 보이려 애쓰는 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는 뜻이다. 즉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존중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러니 나날이 자존심만 세지고 사소하고 엉뚱한 곳에서 모욕감을 느끼고 크게 분노한다.       


어느 순간 내가 자꾸 자존심을 들먹인다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이게 정말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지. 아니면 내 자존감이 낮아져서 그러는 건지. 낮은 자존감이 원인일 확률이 크다. 자존심을 챙기기 전에 자존감부터 돌보는 것이 어떨까?   

  


또 이렇게 말하면, 내가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고 커서... 우리 부모가 나를 너무 엄하게만 키워서... 라며 자존감은 어릴 때 만들어지는 거지 스스로는 채우지 못하는 거라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자존감의 수준은 유년기에 완전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어른으로 성장하는 동안에 자존감은 성장하거나 퇴보할 수 있다. 예순 살 먹은 사람보다 자존감이 높은 열 살 아이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 경우도 가능하다. 또 자존감은 일생 동안 끊임없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할 수도 있다.” 자존감을 처음 대중에 알린 미국의 심리학자 너새니얼 브랜든이 그의 저서 <자존감의 여섯 기둥>에서 한 말이다.      


어릴 적 핑계 대지 말고 자존감은 스스로 키우자. 그리고 이젠 ‘내가 누군지 알고’ 같은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네가 누군지까지 알아야 하나? 난 나 하나 알기도 벅찬데. 

© brnkd,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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