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여행의 끝맺음

by 오기우기

공항버스를 타고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파리를 떠나는 마지막 순간, 마음이 묘하게 뒤섞였다. 여행의 끝자락에 서 있다는 실감이 나면서도, 아직 모든 게 끝난 것 같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덕분에 출국 수속도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낀 채 공항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출국 심사 때는 어쩔 수 없이 선글라스를 벗어야 했다. 그 순간, 심사관이 내 여권과 얼굴을 번갈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심사관뿐만 아니라 여러 명이 내 얼굴을 보며 갸우뚱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순간 당황한 나는 아무렇게나 말도 안 되는 단어를 내뱉었다. "알로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그 한마디에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 심사관들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수속을 마쳐 주었다. 출국장에서 벗어난 뒤에야 내 행동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창피하면서도 웃겼다. 그 순간만큼은 지우고 싶은 흑역사 같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마저도 재미있는 추억이다.


비행기 탑승 전,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이 시간, 지난 8박 9일간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든 살아서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감사하면서도, 마지막 밤 비를 쫄딱 맞으며 헤매던 우리가 떠올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참 이상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는 힘들다고 투덜댔던 일들이,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그럴듯한 추억으로 남아버린다니. 그리고 공항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내내 대명이의 메시지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새벽부터 파리 시내를 헤매며 나를 기다렸다는 사실이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어쩌면 그는 정말 내 상태가 걱정되어서 그런 걸까?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뭔가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대명이가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이 행동이 우리의 관계를 애매하게 만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진심이 느껴져서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따뜻해졌다. 이런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여행 내내 우린 그냥 친구였는데, 이 순간만큼은 그 이상과 이하의 어딘가에 놓인 듯했다. 이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하면서도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메시지를 다시 확인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이 감정도 사라질까? 아니면, 이 여행이 새로운 무언가의 시작이 될 수도 있을까?


우리는 한 숙소에서 8박 9일을 머물렀다. 숙소를 고를 때 기준은 단 두 가지였다. 교통이 편리할 것, 그리고 가성비가 좋을 것. 어차피 일정이 빡빡해서 잠만 잘 곳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성비'를 따진 것이 문제였을까? 그곳에서도 꽤나 많은 일이 벌어졌다. 숙소는 매우 좁았지만 여자 둘이 지내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수건이 딱 4장만 있었다. 우리는 "설마 수건 안 바꿔 주는 거 아니겠지?" 하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2일 차 밤이 지나고, 3일 차가 되어서도 젖은 수건 네 장은 그대로였다. '설마'가 '역시나'가 되었다. 결국 호스트에게 요청했고, 4일째가 되어서야 겨우 새 수건을 받을 수 있었다. 찝찝했지만, 우리는 결국 이 상황에 적응하기로 했다. 하지만 진짜 황당한 사건은 따로 있었다. 파리 시내에 위치한 우리 숙소는 대문은 키패드로 열고, 내부 숙소 문은 열쇠로 여는 구조였다. 그리고 이동할 때마다 열쇠는 지정된 곳에 두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날 우리는 근교 여행을 다녀온 후 새벽 2시에 숙소에 도착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대문을 열고, 익숙하게 열쇠함을 뒤적였다. 그런데...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제대로 못 찾고 있는 걸까 싶어 다시 찾아봤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열쇠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순간 아찔했다. 새벽 2시,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숙소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니. 심지어 창문을 타고 들어갈까 고민했지만, 창문 크기가 너무 작아서 불가능했다. 우리는 곧장 호스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응답이 없었다. 연이어 전화를 걸고, 프랑스어로 번역한 메시지를 보내봤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절박한 마음으로 숙소 예약 사이트를 통해 문의를 넣었다.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며 2시간을 보낸 끝에, 새벽 4시가 되어서야 호스트로부터 답장이 왔다. "청소하면서 직원이 열쇠를 다른 곳에 뒀네요. 거기에 있어요." 너무 어이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아침 7시에 나가야 하는 일정이 있었기에 짜증낼 힘조차 없었다. 그저 한숨을 내쉬며 열쇠를 찾아 숙소로 들어갔다.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숙소는 '호텔'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사실상 에어비앤비에 가까운 곳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 일이었지만, 그것조차도 이제는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새 비행기 탑승 시간이 되었다. 가슴 한편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묵직해졌다. 여행이 끝난다는 아쉬움인지, 대명이가 남긴 감정의 흔적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겐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한국에 돌아가면 첫 회사를 마무리해야 했고, 6년을 채우지 못한 채 퇴사를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곧 미국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예정이었다. 나에겐 연애보다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 이 감정도, 이 여운도, 결국은 흩어질 것이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아쉽다..." 무심코 흘린 내 말에 친구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 진짜 정신 나갔어? 그렇게 아프고 힘들어 놓고 지금 아쉽다고?"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우리 추억이잖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친구의 잔소리가 시작되었지만, 그조차도 즐거웠다. 파리에서의 모든 순간이 추억으로 남는 것처럼, 이 여행에서의 우리도 그렇게 기억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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