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건대입구역에서

by 오기우기

파리 버스정류장에서 대명이를 배웅한 지 3주. 그날 마지막으로 본 그의 뒷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한국에서 다시 만난다.

거울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옷은 왜 사도사도 매번 없는 걸까. 너무 꾸미진 않되, 여성스러움이 느껴지는 흰 티와 긴치마를 골랐다. 화장은 오랜만에 풀메이크업으로, 머리는 고데기로 자연스러운 웨이브를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화장하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가 사는 곳의 중간 지점인 건대입구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대명이는 어젯밤 한국에 도착했고, 다음 날인 오늘 오후 6시, 2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서울이고, 술을 마실지도 모르기에 나는 차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지하철 안에서 설렘과 기대, 그리고 어색함에 대한 걱정이 교차했다. 당시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한국에서 다시 만나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오후 5시 50분,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나 도착했어, 2번 출구 앞에 있을게!" 연락을 보내고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눈앞이 어두워졌다. 고개를 들자 대명이가 환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빨리 왔네?" 그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색할 줄 알았는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며 편안함을 느꼈다.

대명이는 미리 알아본 카페가 있다며 나를 데려갔다. 서로 커피를 주문하고 파리에서 있었던 일들을 나누었다. 사실 나도 카페를 찾아봤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대명이는 화가와 작품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다. 나는 서양미술사를 전공으로 들었지만 너무 어려워서 다시 배우고 싶지 않다고 웃으며 말했고, 우리는 서로가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화는 끊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대명이는 큰 에코백을 메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방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야?" 내가 묻자 그는 얼른 열어보라고 했다. 상자를 열자 가운데에는 노란 생화 한 송이가, 그 주변에는 작은 기념품들이 가득했다. "이건 여행 중에 하나씩 모은 거야. 스페인,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여기저기 다니면서 너 생각날 때마다 샀어." 대명이는 선물을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라, 그가 나를 떠올리며 준비한 흔적이 담긴 것이었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너 만나면 주려고 사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가득 차 있더라."

그가 메고 온 큰 가방에서 이 상자를 꺼내고 나니,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텅 빈 가방을 들고 다닌 대명이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마음 깊이 따뜻해졌다.


우리는 카페를 나와 돼지두루치기를 먹으러 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한식인데, 대명이는 우연히도 한식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가볍게 맥주를 곁들이고, 2차로 맥줏집에 가서 먹태를 안주 삼아 다시 한 잔했다. 술이 조금씩 들어가자 대화는 더 깊어졌고, 대명이는 한없이 착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왠지 대명이가 고백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예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우리 사귀자."

대명이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엔 단순한 여행 친구였는데, 시간이 지나며 감정이 변했다고. 앞으로 더 알아가고 싶다고.

나는 흔들렸다. 하지만 현실이 감정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며칠 전 퇴사하며 수입이 사라졌고, 야간 대학에 다니며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해야 했다. 게다가 미국 워킹홀리데이를 앞두고 있었기에, 연애는 내게 사치처럼 느껴졌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대명이는 "네가 워홀을 떠나도 기다릴 수 있어"라고 말했다.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명이는 마지막으로 세 번만 더 만나자고 했다. "어디에 있든 내가 찾아갈게. 세 번만 더 만나줘. 그때도 마음이 같다면, 그땐 내가 포기할게." 어딘가에서 본 로맨스 소설 같은 대사였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서로 정반대 방향이었지만, 대명이는 꼭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함께 지하철을 타고, 대명이는 내 집 근처 역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1시간을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우리의 첫 만남은 끝났다. 대명이의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고, 나는 흔들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누군가를 만나 감정과 시간을 할애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아쉬운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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