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봄, 온 미국을 뒤흔들었던 사건이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폭동(L.A. Riot)’. 흑인 운전자 한 사람을 단속하던 백인 경찰 네 사람이 사정없이 팼던 영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촉발된 도시 소요.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계를 망라하는 유색 인종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에 대해서 심각하게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고, 지역의 한국 교민들에게도 여러 형태의 피해를 입히며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서 거듭 경계심을 가지게 하였다. 이후 법정다툼에 불려 나온 피해 당사자 로드니킹(Rodney King)은 증언 과정에서 이 모든 혼란과 소란에 혼란스러운 심경을 한 마디로 요약하며 울부짖었다. “우리 그냥 좀 어울려 살 수 없겠습니까? (Can we just get along?)”
그는 피부 색깔이 다르다는 차별적 조건을 극복할 방법이 이렇게도 없겠냐는 그 나름대로의 안타까움을 그렇게 표현하였던 것이다. 차별적 조건을 찾아내며 끊임없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해 내는 능력은 인간이라면 거의 본성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피부가 다르고 출신이 다르며, 성별이 다르고 성씨가 다르며, 혈액형이 다르고 키와 몸무게가 다르다. 겉으로도 다르고 속으로도 다르다. 생각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며 이념이 다르고 사상도 다르다.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각각 다른 모습과 속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이상 어우러져 살아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흑인 피해자 한 사람의 저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가. 우리는 어울려 살아낼 수 있을 것인가.
‘다르다’는 데서 출발하여 ‘틀리다’는 생각에 이르면, 자칫 구별을 넘어 차별하게 되고 혐오하게 되며 배척하게 되어 폭력과 불공대천의 경지에까지 달하게 된다. 그 같은 파국에 도달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절하고 조정하며 견제하고 경계하도록 우리에게는 ‘정치’라는 장치가 있다. 정치는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이기는 하지만,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일을 하도록 국민이 맡겨준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정치인들은 그렇게 하고 있는가. 정치인이 뱉어낸 말 한마디가 조정과 질서를 불러오기는커녕, 오히려 정치인들 사이의 단절과 반목의 도화선이 되어 사회 일반의 분열과 등돌림의 발화점이 된다면 그는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싸움꾼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당신은 접점을 찾아내는가, 아니면 분열을 조장하는가.
사회 공동체가 조정과 타협을 통해 잘 굴러가도록 돕는 또 하나의 기제가 ‘언론’이다. 언론은 사실을 밝혀 알리는 일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을 하면서, 민주주의가 실제로 구현되도록 사회적 공론의 장과 대화의 마당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독자의 관심을 끌거나 충격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에 머물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의 기초가 될 접점을 모색하고 해결책에 접근하는 대화의 토대를 불러와야 하지 않을까. 그간 언론이 문제를 알려내는 데 기여해 왔다면, 앞으로는 해결을 이끌어내는 일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서구의 언론은 대안저널리즘, 지혜저널리즘, 또는 해결저널리즘 등의 표현을 써가며 새로운 시도에 나섰다고 한다.
남은 어차피 다르다. 남은 언제나 다르다. 그 다른 모습과 생각을 다른 그대로 인정하고 보듬을 수 있을 때에 민주주의로 가는 첫걸음이 비로소 놓아지는 것이다. 다른 그대로 놓아두면 틀림없이 갈등이요 분열이었을 것을, 정치가 조정하고 언론이 담아낼 때에 대화와 타협이 가능해진다. 정치와 언론이 뿔뿔이 흩어놓는 일은 이제 그만 보았으면 한다. 정치와 언론으로 인해 다른 생각들이 더 당겨 마주 앉아야 한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