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해를 맞는다. 신정을 보내고 다시 맞는 설이라 낯익고 반갑다. 날마다 똑같은 날들이었을 것을, ‘새 해’라 부르며 매듭을 짓고 새롭게 시작할 생각을 어떻게 하였을까. 살아가는 동안 세파에 쌓여가는 주름과 시름을 훌훌 떠나보내고 새 날을 맞는 다짐으로 다시 시작하는 일은 얼마나 지혜로운가. 개인도 나라도 회사도 학교도 설 명절 몇 날을 보내며 새 기운을 다지고 싱싱한 각오를 새롭게 채운다.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네 삶이 기름져 가고 풍성해 지기를 모두 기원하며 새 해를 맞는다. 서로서로 다들 모든 일들이 잘 풀려가기를 소원하며 덕담을 나눈다. 나라가 잘 되고 개인이 행복하며 사업도 번창하기를. 적폐라 부르며 딛고 일어서기를 원했고 새 날이 오면 모든 게 잘 돌아갈 것으로 기대하였다.
올 한 해도 무엇이든 잘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은 누구나 한결같을 터이다. 하지만, 왠지 자신이 없다. 왜 그러는 것일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갈수록 나아져야 하는데, 갈수록 서 있는 느낌이 드는 건 나만 그런 것일까. 우리 집만 그런 것일까. 이게 나라냐 물으며 밝혔던 촛불이었는데, 바로 잡혀 모든 게 좋아졌는가 물으면 돌아오는 답들이 신통치 않다. 어찌 된 영문이란 말인가. 수많은 사람들을 묶어서 부를 적에 ‘대중’이라 표현하였다. 큰 무리의 사람들을 통칭하여 부르면서 좋은 리더 한 사람이 멋진 생각을 던지면 모두 함께 따라올 것으로 기대하였다. 실제로 한 때는 그러기도 하였다. 일치단결과 국민총화를 던지고 많은 사람들이 화답하기도 하였으니까. 하지만, 그 시절 그들이 놓쳤던 생각은 ‘민중’이었다.
대중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사이에 희생하고 억눌리며 빼앗기고 힘든 백성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를 새기면서, 천천히 가도 모두 함께 가자는 생각으로 ‘민중’을 떠올리지 않았던가. 소수의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이 나아져 가기를 기대하였다. 더불어 잘 살아본다는 생각이 뿌리내릴 것으로 설레기도 하였다. 다시는 소외와 차별을 겪지 않으며 함께 성과와 결실을 나누기를 꿈꾸었었다. 이끄는 리더들이 민중을 섬기며 낮은 자리로 내려올 것이었다. 덜 가진 사람들을 향한 배려와 나눔이 풍성해질 터이었다. 보통사람들이 어깨를 펴는 날이 가까워질 것으로 기대하였다. 조급해서 그런 것일까 그런 세상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새 해는 나아질까 기대도 하고 혹 희망고문이면 어떻게 하나 우려도 된다.
이념의 방향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세상의 좋은 생각들을 폭넓게 담을만한 큰 그릇이 필요하다. 지극히 소수의 극우와 극좌를 빼고 나면, 보통 사람들은 모두 오른켠과 왼켠 사이의 어디쯤에 있다. 안보에 관해서는 지극히 보수적인 사람이 교육에 관해서는 매우 진보적일 수 있지 않은가. 아니, 그 한 사람도 한 가지 이슈에 대하여 한 때는 보수적이었다가 시류에 따라 얼마든지 진보적으로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정치권이 사람들을 이념의 틀 안에 가두는 일은 잘못짚어도 한참 잘못짚은 것이다. 그래서 쓰이는 표현이 다중(Multitude). 끈끈하고 든든한 연결고리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SNS 등의 약한 연결을 가진 사회집단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대중 또는 민중처럼 구심점을 공유하지 않으며 특정한 이슈들에 대해서는 함께 행동하면서, 개인의 특성을 인정하며 존재한다.
촛불에 동참했던 이들은 다중이 아니었을까. 적폐와 구습을 몰아내는 일에 불꽃처럼 함께 하였지만, 이제는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그러니 쉽지 않을 터이다. 평등과 자율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다중을 우리의 리더들은 어떻게 섬겨야 할까. 새 해에는, 이념으로 재단하지 말고 능력으로 증명하시라. 탕평(蕩平)과 대동(大同)은 오늘 필요한 생각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