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독자는 누구인가요?
가을은 독서의 계절, 사색의 계절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전에는 이 문장에 대한 어느 정도의 느낌과 감성을 받은 적은 있지만 온전하다고 느낄 만큼의 감성을 받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문득 올해 가을은 뭔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낙엽 비에도, 비 오는 풍경 속의 빗방울의 크기와 투명도에도, 출근길 위에 스쳐가는 길고양이들의 발걸음과 울음소리에도 시선이 가고 마음이 간다. 근데 그 마음이 한 폭의 그림같이, 한 장의 스냅샷같이 찰칵찰칵 그리며 내 마음속에 지나간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보고 보고 또 보아왔던 일상 속의 풍경들인데, 유달리 더 깊이 더 자세히 더 다른 각도로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지금 살아가는 이 세상을 그냥 흘러가는 대로 지나쳐 가는 것이 아니라 더 자세히 제대로 알고 살아가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갖고 싶은, 가질 수 있는 마음과 삶의 여유가 나에게 생긴 시간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매일 아침과 하루에도 셀 수 없는 수많은 감동들 속에서도 나에게 유달리 애잔한 마음이 드는 것은 내가 출근하는 길에, 퇴근하는 길에, 그리고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길고양이들이다. 내 눈에는 참으로 애잔한 놈들로 다가온다. 이 '애잔한다'라는 느낌과 표현은 생각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인지 말하기 어려웠다. 근데 사전적 의미를 보니 '무척 가냘프면서 약하다' 또는 '애처로우면서 애틋하다'라고 한다. 그렇게 이 의미를 알고 보니, 내가 가는 길에 만나는 길고양이들을 보면서 드는 느낌이 '참 애잔하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았다.
내가 느끼는 이 애잔한 느낌을 무시하거나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길에, 퇴근길에, 길을 걸어가도, 여행지에서도, 좋은 풍경과 인기 많은 커피집에서도, 어느 좋은 곳을 바라보아도, 마음이 쓰이는 곳이 있다면 그건 내가 그 마음이 쓰이는 곳에 관심과 도움과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이 애잔한 마음이 쓰이는 길고양이들에 대한 도움을 실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캣 맘처럼 고양이가 사는 곳에 사료를 매일 제공할 수도 있고, 다리를 절거나 구내염으로 고생하며 뚝뚝 떨어지는 침을 입에 달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병든 고양이를 동물 병원에 데려가 치료할 수도 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새끼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들어보면서 그 고양이에게 필요한 것이 음식인지, 아니면 잃어버린 엄마와 형제들을 찾고 있는 울음소리인지 관찰하며 도움을 줄 방법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리고 동물 보호단체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 해결 방안을 단체로 모색하는 활동에 참여해 본다. 지금까지 말한 것 외에도 이 애잔한 마음이 쓰이는 곳에 도움과 사랑을 줄 방법은 너무나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길고양이 보호에 대한 인식과 구호 방법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고 개인적 지식과 정보로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길고양이가 애처로워 길을 가다가 사료를 건네주고 가면 어떤 날을 고양이가 맛있게 먹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되지만, 비가 온 후 그 사료는 물러져 고양이도 잘 먹지 않고 더러워져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불법 쓰레기로 전락되기도 한다. 애잔한 그 마음만으로는 길고양이와 도시에서의 공존의 삶에 아직 정확한 로드맵도 보이지 않고, 동물보호법의 지원으로도 아직 채워지지 않는 불안불안한 길고양이의 삶은 오늘도 길거리에서 계속 이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나는 이 애잔한 마음을 채워주거나 해결해 줄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애잔한 마음을 해결해 줄 길고양이와 도시의 공존에 대해 뛰어들겠다는 결심은 매번 한다. 그러나 단지 이 애잔한 마음만을 가진 동물 보호 초보가가 제대로 동물보호와 복지에 뛰어 들어가는 좌충우돌 성장기를 기록하고 싶다. 그 누군가도 나와 같은 이 애잔한 마음에서 동물보호 활동가로 성장하면서 변화하고 싶은 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나의 글들이 조금이나마 공감을 형성하고 함께 할 수 있는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