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변하는 걸까?
오늘은 그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TV를 보면서 가슴에 있는 답답함을 풀어놓듯 크게 웃어재낀다. 부러울 정도로 말이다. 왠지 낯설어 보인다.
남편은 감정을 숨김없이 그대로 표현하는, 아주 솔직한 사람이다. 궁금한 것도 스스럼없이 물어본다. 서로 잘 모를 때조차 너무 솔직한 질문을 하는 바람에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도 있어서 눈치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나는 결혼한 지 30년이 지났어도 남편에 대해 모르는 구석이 많다. 살면서 가끔 낯선 모습을 볼 때 내가 남편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인 모습 때문에 좋은 면까지 덮어버리고 살았던 건 아니었나 싶을 때가 있다. 어쩌면 어른이면서 그 나이에 온몸으로 깔깔 웃으며 TV를 볼 때나 너무 솔직한 탓에 자신이 하는 행동이나 질문이 어린아이처럼 그저 아무 계산 없이 순수한 호기심에 의한 무의식적인 행동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걸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 면이 낯설게 다가올 때 처음부터 그런 면이 있었는지 살면서 조금씩 변화된 모습인지는 잘 모르겠다.
자식도 마찬가지다. 집에서 보는 자식과 밖에서 보는 자식은 많이 다르다. 내 자식은 그럴 리 없다고 착각하는 이유다. 자식이 어릴 때는 부모가 전부였지만 커가면서 인간관계가 확대될수록 자식은 자연스럽게 변화되기 마련이다. 자식이 원하는 것과 부모가 원하는 것의 타협점이 맞지 않을 때, 부모의 순수한 의도를 곡해할 때, 반대로 자식의 마음을 부모가 몰라줄 때, 관계는 조금씩 틀어진다. 겉으로 뱉는 말과 그 속내가 다름을 금방 눈치챈 자식은 대화를 거부한다. 아주 강력한 패를 쥐고 있는 듯 부모의 애간장을 태운다.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없는 자식의 속은 어떨까? 도대체 부모의 모습 어디에서 말을 멈추게 하는 걸까?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님은 분명한데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그 속을 알아내기가 영 어렵기만 하다.
피붙이라도 서로 안 맞으면 돌아서기 마련이다. 그래서 안 맞는다고 안 보면 편할까? 한 지붕 같은 공간에 있는 식구들은 서로의 진심을 몰라줄 때, 풀지 못한 오해로 미움이 쌓여갈 때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며 산다. 대화 없는 채로, 알아주겠거니 싶은 기대감에, 혹은 그 기대가 무너지더라도 흘러가는 시간에 묻어두고 산다. 그렇게 묻어둔 시간들이 차츰 서로의 벽을 만들고 전하려는 진심이 뭐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게 된다.
나의 중학교 짝꿍은 얼굴을 다 덮을 정도로 덥수룩한 곱슬머리에 구부정한 어깨, 시력이 낮아 두꺼운 안경을 썼는데도 파묻힐 정도로 책을 가까이 들여다보던 친구였다. 피부는 하얗다 못해 창백했고 말소리도 작아서 내가 몸을 기울여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시력이 안 좋다 보니 계속 책상 위의 뭔가를 떨어뜨렸고 여기저기 잘 부딪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친구는 나를 많이 의지했고 내가 도와줘야 된다는 생각에 거의 함께 움직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친구가 성가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도와줘야 된다는 마음과 도와주기 싫다는 두 마음이 공존하며 날이 갈수록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번졌다. 그 친구는 자신의 자리에서 멀리 갈 수 없었고 게다가 나는 짝꿍이었기에 친구라고는 나밖에 없었다. 인간적으로 그 친구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처음의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순전히 나의 선택이었다.
순수하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줄어들 때마다 나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 친구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마음을 그 친구가 알아챈 것일까? 어느 순간 그 친구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조금씩 멀어져 갔다. 난 겉으로 표 나지 않게 한다고 했지만 그 친구는 내 말과 행동이 평소와 다름을, 자라면서 발달된 그 친구만의 더듬이로 미세하고 분명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 친구는 더 이상 나에게 어떤 도움도 원하지 않았고 그럭저럭 지내면서 중학교를 마치게 되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적인 말이나 행동에 친구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우리는 분명 우정이라고 생각하며 서로를 위하고 아껴주었지만 결국은 내 본심을 나도 모르게 드러내고 말았다. 시작은 나의 순수한 선택이었지만 그만 벗어나고 싶다고 느끼자 도덕적 양심이 머리를 쳐들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았은데도 난 죄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국 진심은 멀리 사라지고 우리의 우정은 깨지고 말았다.
살아가다 보니 사람은 늘 솔직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곧이곧대로 내보일 수 없는 일도 있고 싫어하는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상황도 많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를 경멸하면서 나 자신을 경멸하기도 하고, 내가 상대방의 처지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난 위로받고 그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진심이라며 위로하기도 한다.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동료들과 잘 지내다가 어느 순간 무시당했던 일과 나를 멀리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그때는 무조건 내 잘못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에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람은 처음과 다르게 모순된 행동을 한다는 걸 깨달았다.
타인을 무시하면서 내적 쾌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겉으로는 간까지 빼줄 것처럼 나에게 다가오지만 결국은 냉정하게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남을 무시하기도 하고 무리에서 내쳐질까 두려워 자신의 몸을 낮추는 사람도 있다. 상황에 따라 요령껏 변화하는 처세술에 능한 사람도 많아서 확확 변하는 인간관계의 지긋지긋함에 진이 빠질 때도 많다. 변하는 사람의 속내는 속속들이 알 수가 없다.
시간이 흘러가며 사물이 변하듯 인간의 마음도 끊임없이 변한다. 지금 상대방이 변했더라도 처음 만났을 때의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상황이, 분위기가 또는 요동치는 생각이 사람의 진심을 변하게 한다.
가끔 나의 어리숙한 모습이 뼈저리게 느껴질 때 짝꿍이었던 친구가 생각나곤 한다. 그 친구에게 가졌던 순수한 진심이 내가 돌봐줘야 할 사람이라는 도덕적인 압박감으로 바뀔 때 그 부담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처음의 순수함을 잃었을 것이다. 사회에 나와 발을 디뎌 보니 그 무게를 내가 감당할 때도 있고 상대방이 감당할 때도 있다. 결국은 나도 그 친구와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때 누구나 예전의 나처럼 돌아서지 않고 끝까지 곁을 지켜주는 사람도 많다는 걸 알았다.
인간의 생각은 살아온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듯이 그 영향으로 살아가며 사람들과 부대끼고 체득한 경험으로 자신의 가치관에 도달하는 것 같다. 그것으로 복잡하고 껄적지근한 인간관계를 풀어가기엔 나의 가치관은 많이 부실하다.
내가 싫고 좋음을 정확하게 전달하여 내 뜻을 관철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에서는 평등할 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한쪽이 양보해서 나온 결과물일 때가 많다. 내가 더 유리한 것을 원하고 내가 불편한 것은 참을 수 없고 어느 정도의 선에서 적당한 불편함만 감수하는 것, 그 중간쯤을 타협하기란 정말 힘들다.
서로 실망하지 않고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게 이성과 양심의 갈등 없이 쿨하게 잘 전달하는 방법을 언제쯤 제대로 터득할 수 있을까? 한쪽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게 말이다.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려워질수록 젊었을 때의 철없었던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올라 이제는 단순해져야 함에도 복잡한 생각에 뒤척이는 내가 못나보여서 자책할 때가 많다. 인간관계 속에서 싹튼 나의 진심이 끊임없이 변했던 것처럼 상대방의 진심도 끊임없이 변한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을 너무 가볍게, 또는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않아야 삶이 산뜻해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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