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를 부탁해 / 신경숙
그녀가 내게로 온다. 그녀의 이름은 박소녀. 그녀의 동력은 모성애다.
도서관의 이동카트에 덜렁 남겨진 붉은 표지의 제목에는 [엄마를 부탁해] 라고 쓰여있다. 엄마라는 단어에 이끌려 불쑥 집어 들었다. 2008년도 작품이다. 오래된 만큼 책은 낡았고 흠집이 많았다. 겉표지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되었고 책 속은 누렇게 바래져 있다. 오래된 책일수록 넘기기가 수월하다. 책을 넘길 때마다 가슴에 박히는 글자들. 엄마가 전해주는 가슴 찡한 것들이 눈물 나게 했다. 엄마를 잃고 난 후부터 글이 시작된다.
남편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시집온 엄마는 늘 일하는 엄마다. 무슨 살림할 것이 그렇게 많은지 늘 일만 한다. 돈이 없어서 일해야 했고, 살만 해지면 늘 해오던 것들이라 해야 했다. 자식들은 늘 그런 엄마만 보면서 산다. 엄마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엄마였고 당연하게 엄마의 사랑을 받아먹고 살아간다.
엄마는 마당 안으로 들어오는 생명들에게 무한정 잘해준다. 남의 집 새끼들도, 떠돌이 개들까지도 거둬먹인다. 엄마의 모성애는 자식만을 향한 게 아니라 모든 것에 향해 있다.
게다가 뻔하게도 남편은 진득하게 집에 있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고 외도까지 일삼는다. 그러나 엄마는 힘들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고 안방 아랫목에 밥 하나를 늘 준비해 놓고 불현듯 남편이 돌아와도 밥상을 뚝딱 차려준다. 엄마에게 있어 내 것이라는 개념, 내 차지는 아무것도 없다. 그냥 다 퍼주고 받아들인다.
엄마가 고통스럽게 아파하는 걸 무심결에 봐왔던 식구들은 그런가 보다 했다. 엄마가 아프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엄마는 글을 못 읽는 사람이다. 그래서였을까? 자신을 마치 부려먹듯 뒤꼍으로만 내몬다.
시골살이에서 도시로 자식들을 내보낼 때 엄마는 자신의 손으로 키우지 못해 미안해했다.
문맹인 엄마였기에 자식들은 많이 배우기를 바랐다. 늘 부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서 자식들은 많이 배워서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기를 바랐다. 엄마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큰 아들이 있는 서울로 큰 딸을 보내면서 미안해했다. 엄마의 마음에는 미안함이 가득하다. 모든 것이 당신 탓인 것만 같아서.
정작 넷째 딸이 아이를 셋까지 낳고 정신없이 키우는 걸 보던 엄마는 자신과 다를 바 없이 아이들 뒤치다꺼리하는 모습을 보고 "너, 이렇게 사냐?"라고 물었다. 자유롭게 딴 세상을 엿보게 해 주려고, 맘껏 자유로워지라고 잔소리 한 번 하지 않고 키웠는데. 딸에게 그런 미천한 마음을 가졌던 것까지 엄마는 미안해했다.
잃어버린 지 구 개월이 지나도록 엄마 소식이 없다. 엄마의 생사여부를 독자는 안다. 구천을 떠돌며 넷째 딸의 마당에 있는 새의 눈으로 딸의 모습을 본다. 그동안 딸들에게 속으로만 가졌던 서운한 마음을, 아파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엄마는 그저 미안하고 미안해했다.
엄마는 왜 자꾸 미안해하고 뭔가를 해줘야 마음이 편할까. 키우는 동안 기쁨을 줬던 자식들. 엄마는 그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해 줘서 고맙다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난다.
엄마는 죽음이 얼마 안 남았음을 직감했고 기억을 잃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했다.
▶ 엄마를 부탁해 中
◸그런디 고모. 나는 몇 해 전에 세워놓은 선산의 가묘로는 안 갈라요. 그리론 안 가고 싶네. 이 집서 살 때 혼미한 정신에서 깨어나게 되면 혼자서 걸어 걸어 가묘를 찾아가 보았소. 죽어서 갈 곳인데 정붙여놔야지 싶어서. 햇볕도 잘 들고 거기 휘어진 채로 또 우뚝 서 있는 소나무도 맘에 들기는 하는디 죽어서도 이 집 사람으로 있는 것은 벅차고 힘에 겹네. 마음을 달래 보려 노래를 부르며 풀도 뽑아주고 자리를 펴고 해가 저물 때까지 앉아 있어보기도 하고 그랬는디 마음이 안 붙어라오. 오십 년도 넘게 이 집서 살았응게 인자는 날 쫌 놔주시오. 그때 가묘 세울 때 고모가 내 아래에 자리 잡으라 했을 때 내가 눈을 흘기며 아이구 죽어서도 고모 심부름을 하게요, 했던 거, 지금 그 말이 생각나네. 서운케 생각하오, 고모. 오래 생각했지만 복잡한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니요. 그냥 나는 내 집으로 갈라네요. 가서 쉬것소.
아, 봄날 새싹들처럼 정신없이 솟아나는 이 기억들을 어디서 멈춰야 할지를 모르겄네. 잊혀진 온갖 것들이 다 몰려오네. 부엌 살강에 엎어진 밥그릇이며 장꽝의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며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좁다란 나무계단이며, 흙담 밑에서 태어나 담장을 타고 무성히 뻗어나가던 호박넝쿨들까지.
집을 이렇게 꽁꽁 얼게 두지 말아요.
잘 있어요.. 난 이제 이 집에서 나갈라요.
저기,
내가 태어난 어두운 집 마루에 엄마가 앉아 있네.
엄마가 얼굴을 들고 나를 보네. 내가 이 집에서 태어날 때 할머니가 꿈을 꾸었다네. 누런 털이 빛나는 암소가 막 무릎을 펴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네. 소가 힘을 쓰며 일어서려는 참에 태어난 아이이니 얼마나 기운이 넘치겠느냐며 이 아이 때문에 웃을 일이 많을 것이니 잘 거두라 했다네. 엄마가 파란 슬리퍼에 움푹 파인 내 발등을 들여다보네. 내 발등은 푹 파인 상처 속으로 뼈가 드러나 보이네. 엄마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네. 저 얼굴은 내가 죽은 아이를 낳았을 때 장롱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네. 내 새끼. 엄마가 양팔을 벌리네. 엄마가 방금 죽은 아이를 품에 안듯이 나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네. 내 발에서 파란 슬리퍼를 벗기고 나의 두발을 엄마의 무릎으로 끌어올리네. 엄마는 웃지 않네. 울지도 않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나는 엄마처럼 못 사는데 엄마라고 그렇게 살고 싶었을까? 엄마가 옆에 있을 때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딸인 내가 이 지경이었는데 엄마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고독했을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로 오로지 희생만 해야 했다니 그런 부당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어.
나는 엄마에게 말할 테야. 엄마가 한 모든 일들을, 그걸 해낼 수 있었던 엄마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엄마의 일생을 사랑한다고, 존경한다고.
오빠는 엄마의 일생을 고통과 희생으로만 기억하는 건 우리 생각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엄마를 슬프게만 기억하는 건 우리 죄의식 때문일지 모른다고. 그것이 오히려 엄마의 일생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일일 수도 있다고.
엄마는 모든 것에 감사해했다고. 엄마의 감사함들은 진심이었다고 했다. 감사함을 아는 분의 일생이 불행하기만 했을 리 없다고.
너는 깨달았다. 전쟁이 지나간 뒤에도, 밥을 먹고살 만해진 후에도 엄마의 지위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엄마가 끊임없이 되풀이해내야 했던 일들을 거들어주기는커녕 너조차도 관습으로 받아들이며 아예 엄마 몫으로 돌려놓고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때로 오빠의 말처럼 엄마의 삶을 실망스러운 것으로 간주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인생에 단 한 번도 좋은 상황에 놓인 적이 없던 엄마가 너에게 언제나 최상의 것을 주려고 그리 노력했는데도. 외로울 때 등을 토닥여준 사람 또한 엄마였는데도.◿
난 가끔 모성애의 기준을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내가 남들보다 모성애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죄책감이 든다. 엄마는 희생해야만 하는 존재일까? 재난을 당할 때도 몹쓸 짓을 당할 때도 엄마는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존재일까? 난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난 그렇게 못할 것 같다. 죽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도 막상 죽음 앞에 약해지는 인간이 난데. 그러면서 늘 자식들 걱정을 한다. 걱정하는 것이 자식을 위한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것도 모성애라고 우기고 싶지만 올바른 모성애라고 하기엔 많이 부족하다.
신경숙 작가는 어머니로 글을 시작했다가 글이 막혀 엄마로 바꾸었더니 글이 잘 풀렸다고 한다. "엄마"라는 단어는 단순히 엄마가 아니다. 나의 엄마가 글 속의 엄마처럼 대단히 희생적인 엄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엄마라는 말을 입에서 꺼내는 순간, 울컥하는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나의 부족함을 전부 이해해 줄 것만 같은,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용서해 줄 것 같은, 엄마라고 소리치는 순간 아픔이 사라질 것만 같은, 그런 신적인 존재. 엄마는 나의 엄마일 뿐만 아니라 모두의 엄마이다.
박소녀를 생각한다. 엄마와 박소녀. 뭔가 어울리지 않지만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죄어왔는데 읽고 한참이 지나니 박소녀의 고된 얼굴보다 미소가 가득한 얼굴이 떠오른다. 그 얼굴을 내 두 손으로 살포시 만져보고 싶다. 가난해서, 못 배워서 그랬다 쳐도 당신의 넘치는 사랑을 누가 감히 따라갈 수 있었을까! 자식을 위해 모든 걸 다 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마음이 아니다. 울타리로부터 식구들로부터 자유를 갈망했던 엄마는, 소녀는, 기억을 잃고서야, 생을 마치고서야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아니 그래도 난 박소녀가 부럽다. 자식들에게, 남편에게 아름다운 추억과 사랑을 남기고 떠났으니까. 몇십 년이 지난 현재, 자식들에게 부모는 사랑이 아닌 무력함을 남기고 생을 마치는 백세시대가 되었다. 멀리해야 함에도 늘 보고 싶은 자식들. 자유로워지고 싶지만 자유롭지 않은 육신 때문에 자식 생각이 절로 난다.
나의 바람은, 사랑이.. 모성애가 다 소진되었을 때 딱 맞춰서 고개를 떨궜으면 좋겠다.
이제 소녀를 보내야겠다. 그녀로 하여금 나의 메마른 모성애가 잠시나마 활발하게 요동쳤다. 고마워, 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