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나서 고달프다
바람이 상쾌하다. 목도리도 없이 얼굴을 그대로 내놓고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눈부신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호수. 나도 저 호수 위의 윤슬 가운데 하나가 되어 보석처럼 빛나고 싶다.
나는 한때 무리들 가운데 제일 반짝이는 사람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앞서가는 하얀 옷을 맞춰 입은 듯한 두 여인의 발걸음이 무대 위의 댄서처럼 춤을 추듯 팔을 벌리고 날아오를 기세다. 그녀들의 신난 뒤태를 보다가 무심코 따라 할 뻔했다.
호숫길을 걷다 보면 오리들끼리 영역싸움 하는 걸 볼 때가 있다. 날개를 활짝 펴고 요란하게 물장구를 치며 부리로 쪼아대는 강과 약의 싸움을 보노라면 잔잔한 호수가 갑자기 요란스러워진다. 평화로워 보여도 분명 서열이 있는 동물의 세계. 윗자리를 노리고 또는 유지하기 위해 인간도 늘 정진하며 산다. 어디를 가더라도, 하물며 작은 울타리인 가족 간에도 서열이 존재한다. 나는 몇 번째일까? 내가 우두머리 같다가도 맨 꼴찌 같은 기분이 종종 든다.
내가 아이를 낳고 힘든 것 중에 하나는 아이를 특별하게 키우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아이에게는 제일 맛있는 것, 제일 예쁜 것만 보고 입히고 느끼게 하고 싶었다. 예를 들면, 김밥을 만들다 보면 간혹 옆구리가 터지거나 꽁지는 모든 재료가 삐죽삐죽 튀어나와 보기 싫을 때, 아이에게 제일 예쁜 모양의 김밥만 골라 담아줄 때가 있다. 그러면 골라준 나머지는 결국 내 차지가 되는 것이다. 그 뜻은 넌 그렇게 예쁜 것만 보고 먹으며 살고, 보통 이상의 아이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겨있다. 아이는 엄마의 행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성장하게 되고 매사 자신이 맞닥뜨린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도 남과 달리 유별나게 된다.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 깨작거리며 골라먹는 아이가 되어 있고 모양과 색이 조금만 이상해도 거들떠보지 않는 유별난 아이는 인간관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여러 상황에 처할 때 자신이 배운 대로, 아닌 것은 물리치고 받아들일 것은 몸에 남는다. 부모가 만들어준 환경과 사회에서 맞닥뜨린 환경을 나름대로 받아들이며 성장하게 되고 결국 내 몸에 남은 것들이 삶에 어떻게 관여할지 그때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성장과정에서 부모와 아이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기류가 흐른다. 아이들은 부모의 세세한 부분까지 마음으로 느끼는 촉이 있어 표정만 보고도 부모의 기분을 알아차린다. 부모의 태도로 아이는 성장하고 부모가 내뱉는 말투로 가치관이 형성된다. 다 큰 자식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보일 때 나를 닮아가고 있다는 걸 뼈아프게 느낀다. 그래서 아이가 가진 특별함은 내가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보인 행동과 관계가 깊다. 아이를 특별하게 키우고 싶은 욕심은 사실 살아가는데 아무 쓸모가 없다. 오히려 독이 될 때가 많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 무리에 속하는 순간 그 특별함은 뒷말 나오기 딱 좋은 얘깃거리이며 까탈스러운 친구라는 오명이 씌워질 수 있다.
시아버님은 집안에 여자가 잘 들어와야 그 집안이 잘 돌아간다는 말을 간혹 하신다. 여자는 며느리다. 집안이 잘 돌아가면 아들 탓이고 잘 못 돌아가면 며느리 탓이다. 그저 남탓하기 좋아하는 사람의 말로 지나치기엔 기분이 막 나빠진다. 나는 며느리이자 딸을 가진 부모인데. 시아버님도 딸이 있는 사람이면서.
그렇다고 내가 시누이집안은 잘 돌아가냐고 따질 수는 없다. 따지다 보면 옛날이야기 나오고 왜 거기서 그 말이 나오냐고 또 서로 할퀴고 물어뜯게 된다. 결국은 서로 자신의 입장을 말하려다 기분만 나빠진다. 내 속을 잘 드러내서 나는 이러한데, 넌 어때? 정도의 가벼운 대화로 마음을 풀 수 있으면 좋으련만 대화를 하다 보면 옛날 생각이 스치면서 분노가 치민다. 그러다 보면 네가 잘났네, 내가 더 잘났네, 내세우다 상처만 남는다. 내 자식은 특별하고 남의 자식의 기분은 안중에도 없는, 이런 고집은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까? 사람과의 관계는 상대적인데 아무리 집안이 기운다고 여자 탓을 하다니 너무 원통하다.
오래전 기억을 되살려보면 시엄니는 남편을 위해 늘 뭔가를 만들고 계셨다. 아버님은 시엄니의 상전이었다. 매끼 새로운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하다 못해 제시간에 대령하기 위해 계속 나를 채근하셨다. 왜 그렇게 남편을 상전 대하듯 안절부절못하실까? 늘 의문이었다. 단지 며느리인 나에게 시부모에게 잘해야 된다는 무언의 압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모습은 시엄니의 시엄니가 시엄니에게 대물림해 준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시엄니는 특별한 자식이었던 남편을 위해 전전긍긍하신 거였다. 자존심 강한 시엄니로서는 완벽한 아내로서 나는 이만큼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부부는 평등하건만, 자식에 대한 특별함이 시엄니에게는 고스란히 고달픈 의무감으로 물려받은 것이다. 남편을 특별하게 대우하셨던 시엄니의 아내 역할 덕분에 시엄니가 안 계신 현재, 난 시엄니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 제시간에 새로운 반찬을 매끼 해드려야 하는 며느리의 고충을 시아버지는 절대 모를 것이다. 특별한 자식이라는 특권을 대물림한 대가로 가족으로 받아들인 며느리에게도 당신의 남편과 자식을 특별하게 대해 달라는 시엄니가 온몸으로 보여준 모습 때문에 대충 하게 되면 완벽하지 못한 며느리, 아내가 될까 봐 불안해지려 한다. 난 남편의 동반자로서 결혼한 것이지 상전을 모시려고 결혼한 게 아니다.
지금은 집밥을 굳이 고집하는 시대는 아니다. 오히려 시간을 아끼고 집안 노동을 줄이기 위해 배달시켜 먹고 자신의 일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특별했던 하나가 둘이 살려면 특별함은 잊어야 한다. 자신이 엄마에게 대우받았던 은연중에 몸에 밴 습관은 버려야 한다. 내 자식은 며느리가 될 수도 있고 사위가 될 수도 있으므로 귀한 자식 운운하다 집안은 특권을 지키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자식이 부모를 꼭 모셔야 된다는 관념도 사라졌고 홀로 남겨졌을 때 새로운 집단에 순응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렸던 특별대우는 아무 쓸모가 없으며 특별함을 지키려다 자신만 초라해지고 외로워질 수 있다. 보편적인 음식에, 보편적인 손길에, 보편적인 사람들의 시선, 그런 것들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몸과 마음이 편해진다.
그저 사회가 나한테 쥐어준 것에 고맙다고 순응하고 살아가는 것도 바보 같아서 싫지만 무조건 마음에 안 든다고 혼자 독불장군처럼 뻣뻣하게 살아가는 것도 싫다. 자식이 맘에 안 들어도 속은 다를지언정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안 보고 원망하는 것보다 낫다. 자식의 잘못을 굳이 따져가며 자식 앞에서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것은 너무 시대착오적이다. 또한 세상만사 남탓하기에는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다. 모든 관계로부터 오는 불신은 누구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므로 마음속에 있는 시멘트처럼 굳어버린 고집은 이제 좀 내려놓았으면 좋겠다.
훗날 홀로 남겨질 나를 위해서 어디에 가든 잘 적응할 나를 위해서, 차려준 음식에 감사하고 누구의 말이나 행동을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며 내 손을 잡아줄 누군가 한 명쯤은 만들어놔야 여생이 팍팍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