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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

▶ GV빌런 고태경 / 정대건

by 달자

주류에 밀려 어디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삼류. 충분한 제작비를 지원받아 주목받는 감독으로서 살고 싶지만 그런 이들은 하늘에서 정해준 사람만 기회가 있는 듯하고 뭘 하든 실패만 거듭하는 인생. 열정은 가득한데 돈이 없어 열정이 버거운 30대 영화감독 조혜나와 옛날 감성의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사를 기웃거리는 50대 남자 고태경.

그 슬픈 현실에서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요즘 핫한 정대건 작가의 베스트셀러는 빌리지 못하고 대신 정대건이라는 사람에 대해 호감이 생겨 'GV빌런 고태경'을 빌렸다. 글을 참 정갈하게 잘 쓰는 작가이다. 어디 하나 튀는 것 없이 천천히 읽다 보면 마음이 점점 고양된다. 정대건작가는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 놓인 누군가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영화가 좋아 영화학교를 졸업 후 만든 첫 작품을 처참하게 실패한 조혜나. 좀 더 미래가 보이고 돈이 되는 직업을 가지라는 부모의 반대도 무릅쓰고 선택한 영화감독이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잘 되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이건 뭐 길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내 길이 아닌가? 싶은 내적 갈등.

그리고 또 한 사람. 영화 시사회에서 관객과의 대화(Guest Visit, GV) 코너만 찾아다니며 온갖 쓴소리를 해대는 고태경. 그는 조감독에서 영사기사까지, 촬영현장에서 영화를 배운 뼛속까지 영화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서도 그를 찾지 않아 돈벌이로 선택한 택시기사를 하고 노인학교에서 영상편집을 가르친다.

고태경은 자신이 원치 않는 장르의 영화감독을 거절한 결과 돈도 잃고 애인도 잃었다. 그 시절 그때의 트렌드에 편승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고집으로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이다.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는 아마 똑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그만큼 영화에 진심인 사람이다. 조혜나는 고태경의 다큐를 만들면서 겉으로만 봤던 사람과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 보니 자신도 그와 비슷한 사람이란 걸 느끼면서 그와의 대화, 그의 삶을 통해 자신도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는지 깨닫게 된다.


pixabay




◸소설 내용 中 발췌


"혜나야. 영화감독이 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니?"

"촬영은 촬영감독이 하고, 연기는 배우가 하고. 감독은 선택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선택에는 정답도 없고. 그래서 어렵지."

"인생처럼요?"

"그 수많은 사람들이 왜 감독의 말을 듣겠어. 남들보다 잘 선택해야 돼. 선택의 프로가 되어야 해."

"인생을 잘 살면 영화도 잘 만들 수 있을까요? 잘 산다는 게 어떤 걸까요?"

"계속 고민해야지."

"잘 살아야겠네요. 그럼."

"그럼."


영화를 찍으면서 드물게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좀처럼 확신을 못 갖던 내가 배우의 감정과 카메라의 움직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프레임에 들어오는 햇빛의 반사, 지저귀는 새소리까지 모든 게 만족스러워 시원하게 오케이를 외칠 때가. 그렇게 얻은 화면이 영원한 지속의 순간이 되어 스크린에 상영될 때, 그 쾌감은 영화 만들기라는 미친 고생을 다시 하게 만드는 희열이 되었다.

삶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오케이를 외친 순간들이 드물게 있었다. 무언가가 좋다는 감정,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들. 사람들은 그래서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불확실한 생에 확신이라는 것을 가져보고 싶어서, 결국 영화를 만드는 것은 많은 선택지 앞에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고백하는 것이었다.

삶은 엉터리고 대부분 실망스러운 노 굿이니까 사람들은 오케이 컷들만 모여 있는 영화를 보러 간다. 우리가 '영화 같다' '영화 같은 순간이다'라고 하는 것은 엉성하고 지루한 일상 속에서 오케이를 살아보는 드문 순간인 거다.


이제는 실패가 나의 일부라는 것을 명확하게 안다. 인생이 '원 찬스'가 아니고 내가 다 날려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뿐이다. 기회를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와 연출 노트를 열심히 쓰면서.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준비가 아직 안 된 것 같아"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언젠가 마침내 극장으로, 그 어두컴컴한 곳으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신기루를 좇는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땀 흘리고, 완성된 영화가 빛이 되어 먼지를 뚫고 흰 스크린 위에 움직이는 환상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우리가 보낸 세월이 빛이 된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박원호 교수가 말했던 선택의 프로.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나는 앞으로도 실수하고 후회하고 반복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미워하지는 않을 거다.


"돌이켜보면 뭔가를 도모하고 거기에 몰두할 때가 제일 행복한 것 같아." ◿ (진심 맞는 말)


pixabay



글 중에는 선택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으로 사라진 '만약'의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만약'에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 잘 나가는 주류에 속해있을까?


나는 아주 작은 선택까지 합하면 하루에도 수없이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선택만 잘했어도 지금 이렇지는 않을 텐데라는 생각도 한다. 그리고 선택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정말 영화처럼 시간여행자가 된다면 난 과거의 어떤 날로 가고 싶을까? 뭔가에 미쳐서 밤을 꼴딱 새도 모를 만큼 몰두했던 때가 있기나 했었나?


요즘같이 먹고살기 힘든 시절은 돈이 되면 뭐든 닥치는 대로 일을 할 수밖에 없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으로 정당한 보상을 받기도 어려운 시절이기에 마음에 목표만을 가지고 살기엔 미래가 불투명하다.


이 소설에서는 영화판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 겪는 심적 고통들을 조혜나, 고태경을 빌어 이야기한다. 사는 동안 선택의 기로가 어디 한 번뿐이겠는가? 돌이켜 '만약 그랬다면'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한 번뿐이겠는가?

조혜나가 첫 작품으로 만든 '원찬스'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자신의 작품을 불법사이트에 올리기까지 한다. 실패가 몸에 밴, 영화감독을 꿈꾸는 사람. 고태경도 조혜나도 누군가를, 무언가를 선택하는 기회는 많았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그때의 진심이 향한 곳이다. 그 진심이 훗날 쓰라린 아픔을 줄지라도 그 진심은 목표와 맞닿아있다. 그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간다는 건, 그 선택에 따른 실패의 모멸감을 수없이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그 실패를 통해 딛고 일어서는 연습을 무수히 했을 것이므로 그 힘들을 모아 마지막 원 찬스를 위해 쏟아부으면 될 일이다.

나도 느끼는 것이지만 어떤 목표에 도달했을 때보다 그 목표를 향해 몸담고 있던 그 순간이 제일 많이 기억난다. 다시 안 올 그 시간이기에, 샘솟았던 열정이, 그 몰입이 그리움으로 남는다. 어떤 일이든, 어떤 사람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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