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밀
오늘은 적당히 잘 익은 김치를 넣고 콩나물국을 끓였다. 아직까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새벽공기에 연로한 아버님은 연이어 재채기를 하신다. 움직이다 보면 금세 열이 올라 활짝 열 테지만 오싹한 기운에 베란다 창문을 꼭 닫았다. 동선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뭘 하려 했는지 금세 잊는 건망증 탓에 자꾸 종종걸음이 된다.
김치국물과 어우러져 시원한 콩나물국과 고추장양념으로 버무린 북어채를 놓고 아침을 먹은 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과를 시작했다.
여기저기 오가며 정리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바깥 풍경을 보다 보니 다음 달이면 챙겨야 할 어버이날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듣고 싶은 자식들의 고운 말과 고운 미소가 갈수록 그리워지는 날들이다. 나도 그렇게 못하면서 바라는 건 많을 나이. 그렇지만 내색할 수 없는 나이. 시아버님의 마음을 알면서도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나.
아들의 방을 정리한다. 언제쯤 이 어지러운 책상이 말끔해질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올까?
정리하며 이것저것 살피다 보면 문득 비밀스러운 것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영원히 모를 수도 있을 그 비밀들을 알아버렸을 때, 아들은 이 상황을 잘 헤쳐나가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힘들고 괴로워 주저앉아 있을까? 궁금해진다. 당장이라도 불러서 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꾹 눌러 참는다.
겪으며 아플 20대 청춘이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중이라면 좋겠다. 내 간절함과 진심을 담아 정리하고 치우고 버리고 방문을 닫는다. 방문을 닫을 때면 더더욱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내가 닿을 수 없는 아들의 마음이 조약돌 하나 던지면 서서히 잔물결이 퍼지듯 그렇게 시나브로 아름다운 무늬가 그려지면 좋으련만. 요동치는 마음이 언제쯤 잔잔해질까?
엄마는 나를 보면서 알게 된 비밀들을 어떻게 참아내며 극복했을까? 결국은 다 잘될 거라 믿고 참아낸 마음의 고통들이 몸에 여기저기 흔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나도 엄마를 닮아가겠지.
벚꽃의 꽃잎들이 하얗게 거리에 쏟아져 내린다. 눈처럼 내리는 벚꽃의 춤사위가 눈호강을 시켜줬다. 그야말로 흐드러지게 피우고 인간들을 황홀하게 홀린 후 사라지라고 자연의 신이 벚꽃나무한테 일렀나 보다. 바람 한 방이면 너울대며 우수수 쏟아질 꽃잎들과 서로 꼭 붙어 매달려 있는 꽃송이들을 내 눈동자에 가득 담고 올해 처음 미용실로 향했다.
머리 깎는 사람들, 머리를 깎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 무심하게 머리를 만지는 원장님의 손놀림과 그네들의 대화로 난 낯선 미용실에 금방 적응되었다. 듬성듬성한 내 머리는 몇 분도 안 돼서 금세 다듬어졌다.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나고 젊은이와 구부정한 노인이 들어왔다. 며느리와 90세 할머니였다. 자동으로 눈길이 갔다. 90세 할머니는 나보다 훨씬 머리숱이 많았다. 어쩜 저리 곱게 늙으셨을까? 온화한 미소는 귀엽기까지 했다. 90년 동안 전쟁 같은 삶을 사셨을 그분을 보니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겉으로 보면 긴 세월이지만 그 안에 있을 때는 후딱 지나간 세월일 텐데, 사람과 삶을 생각한다면 절대 무시 못할 인생이 갑자기 나의 마음에 묵직하게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푼수끼가 발동해 쓸데없는 말을 건넸다. "어쩜 그리 고우셔요! 머리숱도 많으시구.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나는 모자를 걸치면서 꾸벅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문이 닫히려는 순간, "뭐라고 한겨?" 아차차, 할머니는 내 말을 못 알아들으셨다. 옆에 있는 며느리는 "어머니 예쁘데." ·······. 내 미소는 보셨을 거다. 미소가 뭘 뜻하는지는 아셨겠지, 뭐.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평생 한 움큼씩 먹는 약 때문에 머리숱이 거의 다 빠져버린 엄마, 이제 미용실에는 더 이상 갈 필요가 없는 엄마가 떠올랐다. 몇십 년은 젊어 보이는 엄마의 사진. 풍성한 숱의 가발이 한몫했다. 어쩌면 엄마의 가발을 물려받을지 모를 난 요즘 가발에 관심이 많다. 가발을 쓰고 잔뜩 멋을 부리고 내 머리인양, 바람에 혹여 가발이 벗겨지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하며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미용실에 다녀왔으니 혹시나 싶어 집에 오자마자 거울을 들여다봤다. 상상과 다른 내 모습에 잠시나마 우쭐했던 마음이 머쓱해져 혼자 피식거렸다. 찜해놓은 가발을 얼른 구입해야겠다.
내가 지금 마음에 걱정거리를 가득 품고 있지만 자연의 섭리에 따라 꽃잎들이 미련 없이 다 떨어지듯 내 걱정거리도 별 일 아니게 다 날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