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고의 훈장
오늘 아침은 우럭 세 마리로 매운탕을 끓였다. 검은빛 피부와 영롱한 눈동자, 이미 죽었지만 세포는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의 마지막 모습에 차마 토막 내지 못하고 그대로 끓는 물에 담갔다. 고춧가루가 퍼지면서 우럭에서 나온 기름기가 동글동글 띠를 이루며 육수를 만들어냈다.
이미 아는 맛이지만 이번에는 어떤 맛일까? 처음 맛볼 때의 긴장과 설렘에 내가 과연 오늘은 잘 만들었는지 항상 첫 숟가락을 댈 때, 우습지만 약간의 떨림이 있다.
목에 넘어가는 그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맛이 혀에 닿는 순간 뇌로 전달돼 머리 꼭대기에서 불꽃이 한번 터지고 심장까지 두근거리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눈을 꼭 감고 잠시동안 그 순간을 만끽하며 환한 미소를 짓는가 보다. 그 맛은 지구 두 바퀴 반이나 되는 길이의 혈관을 타고 흘러갈 것이다. 그렇게 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은 일 분이면 사람의 몸을 한 바퀴 돈다고 한다. 실로 엄청난 속도다. 그 맛을 흡수한 혈액은 열심히 돌고 돌며 우리 몸을 건강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위대한 엄마 손. 엄마 손을 장착한 나의 중지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인 걸 이제야 봤다. 그 힘든 장사할 때도 없던 굳은살이 살림하는 동안 생긴 것이다. 딱딱한 굳은살을 만질 때마다 이건 내 손이 아니라 엄마 손이니 수고의 훈장이라고 나름 이름 지었다. 이처럼 나의 수고가 아깝지 않게 식구들의 몸을 건강하게 잘 관리해야 한다.
맛있게 먹는 식구들의 씹고 달그락 거리는 소리들과 어우러진 아침 식사의 조용한 멜로디는 잠깐의 즐거움으로 끝나고 정성스럽게 썰어 넣은 온갖 야채들이 그릇에 남아있을 때 이 아까운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한다. '아까우니 싹싹 먹을까?' '이쯤 딱 그만두면 적당히 배부르고 좋은데, 어쩌지?' 한국 음식은 이게 문제라고 생각하며 아까 느꼈던 즐거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치우고 버리고 씻어내야 하는 노동이 남았다. 잘 우려진 남은 육수와 야채의 잔재들을 그냥 먹은샘 치고 어쩔 수 없이 다 버렸다. 식구들이 맛있게 먹었으면 되었다.
요즘 새벽알바를 하는 아들 때문에 밤늦게 일어나 식사를 준비한다. 늘 아이 대하듯 했던 나로서는 힘들게 일한 후 고된 모습을 보니 내심 안쓰러웠다. 나보다 두 배이상 나가는 몸무게를 보면 힘든 일도 거뜬하게 할 수 있는 체력이지만 일이라는 것은 마음가짐에 따르는 것이라 힘들다고 금방 그만둘 줄 알았는데 그래도 열심히 하려 든다. 내 생각 같아서는 보편적인 생활리듬에 맞게 낮에 일하고 밤에 잠을 자야 하건만 바뀐 리듬 때문에 건강을 잃을까 나의 걱정 세포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간섭은 그만두고 두고 보는 일만 남았다. 세상 돌아가는 만사가 내 뜻대로 되지도 않거니와 내 손으로 한 끼 차려주는 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가끔, 시간과 공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이 올 때가 있다. 그러면 가만히 서서 주변을 헤아려본다. 똑딱거리는 시계, 낮게 들리는 TV소리, 창밖에 보이는 하늘과 구름 그리고 생명들, 그때서야 '아! 시간이 흐르는구나, 나는 살아있구나' 느끼게 된다. 언젠가는 멀리 떠나갈 내 부모, 내 곁에 더 이상 없을 내 자식들, 소리 없이 떠나갈 사람들이 갑자기 온몸으로 느껴져 마음이 공허해진다. 시간과 공간이 멈추고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이 확 끼쳐올 때, 크게 심호흡을 하고 현실을 직시한다. 나는 그대로 멈춰있고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현재가 과거가 되면서 언젠가는 일어날 일들이 자꾸 머리에 그려진다. 내 몸이 맥없이 시간을 좀먹고 있을 날이 올까 봐 두렵다.
앞으로 내가 만날 시간은 만났던 시간보다 훨씬 새롭고 안전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늘 변하지 않는 나이기에 남과 비교하고 위, 아래로 구분 지어 타인의 삶이 더 나아 보인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산다. 그건 내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다.
지금 살아 움직이고 생각하고 나이 들어가는 나 자신을 격려하고 다독거릴 사람은 나 밖에 없다. 구분 짓고, 내 곁을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 홀려 끌려다니는 시간만큼 아까운 시간은 없다.
고유한 저마다의 개성이 있고 각자의 쓰임이 있건만 옳다, 그르다 가르지 말고 누가 더 잘났네, 못났네 비교하지도 말고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일이야말로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진실임을 오늘도 깨닫는다.
식구들의 건강한 몸을 관리하기 위해 나는 내 정신을 온전히 유지해야 한다. 현재는 예전처럼 희생이 미덕이 아닌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엄마가 식구들은 위해 애쓰는 몸과 마음의 시간을 아주 조금이라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엄마의 가장 우선순위는 자식이라는 것을, 그만큼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정수리에서 불꽃이 터지지는 않더라도 차려진 음식을 감사히 먹고 서로 바라보며 안부의 미소를 전하고, 굳은살이 박인 엄마 손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그런 날들이 오래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 엄마는 그저 식구들의 씹는 소리가 즐거운 멜로디로 들리기만 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