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뫼르소
왜, 조물주는 인간을 만들면서 각기 다양한 모양과 성질을 띄게 만들었을까? 인간이 갖고 태어난 유전자에 새겨진 성질들은 수많은 상호작용을 통해 다듬어지고 순화되기도 하고 강해지기도 하면서 적응해 나간다. 내가 간접적으로 만난 모든 인간들의 성질은 참으로 다양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중에는 약자가 있고 강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도덕적인 양심이라는 것은 다분히 개인의 기준일 때가 많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속의 뫼르소는 자신에게 주어진 대로 그럭저럭 잘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마치 세상에 끌려다니는 듯 허무하기 이를 때 없지만 그마저도 익숙해져 현재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뫼르소의 대답은 늘 무미건조하다. 엄마가 죽었다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다. 돈이 없어 일찍 요양원에 모셨고 어머니를 본 지 한참 되었다. 사람들은 장례식에 온 뫼르소가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는 모습을 본다. 내용 중에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무심함을 여러 장면을 통해 묘사한다. 그 후 뫼르소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살인을 저지르고 장례식에서 보였던 그 무심함 때문에 영혼이 없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뫼르소는 왜 갑자기 총을 쏘았을까? 뜨거운 태양열에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봤자 뜨거운 태양은 벗어날 수 없음을 느끼며 문득,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느꼈던 뜨거운 태양과 똑같음을 깨닫는다. 하필 뜨거운 태양빛이 날카로운 상대의 칼에 반사되며 뫼르소의 이마에 부딪혔다. 잠시나마 행복을 느꼈던 조용한 바닷가에서 뜨거운 태양의 번뜩임이 뫼르소를 동요하게 만들었을까?
뫼르소는 분명 살인을 저지르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참지 못하고 네 발이나 더 쏘았다. 죽인 상대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다. 뫼르소는 법정에서 뜨거운 태양이 문제였다고 말한다. 뫼르소의 엉뚱한 대답만큼이나 재판과정에서 검사는 살인보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보였던 무심함을 일관되게 몰아붙였다. 이 인정 없는 아들인 뫼르소가 저지른 살인은 당연한 결과라고 말한다. 검사의 도덕적 양심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던 것이다. 이에 뫼르소의 태도와 그의 살인이 마치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말하는 분위기 속에 그는 이방인이 된 것 같아 권태로움마저 느낀다.
뫼르소는 좁은 교도소에 앉아 자신에게 닥친 사형선고에 대해 생각하고 상고할지 갈등하며 혹시나 하는 희망과 사람이란 아주 불행하게 되는 법은 없는 거라고 말했던 어머니의 말도 떠올린다. 마침 신에 귀의하기를 바라는 신부가 방문한다. 뫼르소는 내세(來世)도 믿지 않거니와 신의 존재 또한 믿지 않으므로 모든 설교를 거부했다. 집요한 신부님의 강요에 결국 뫼르소는 자신의 울분을 전부 쏟아놓는다.
사형집행은 새벽녘에 시행된다. 뫼르소는 그 새벽녘을 맞이할 때마다 자신의 정당함이 하루씩 인정받는다고 느낀다. 그래서 매일 그 새벽녘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바로 새로운 하루가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자신의 인생과 닥쳐올 죽음에 대한 명확한 인식밖에는 없다고 강조한다.
분노의 외침이 끝나고 뫼르소는 문득, 어머니가 생명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에서 남자친구를 사귀고 생애를 다시 시작하려는 행복과 휴식, 해방감을 누렸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아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다고 말한다. 이에 뫼르소는 터뜨린 울분이 괴로움을 씻겨주듯 그동안 닫혀있던 세계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주었음을 느낀다. 자신이 사형집행을 받는 날 외롭지 않도록 많은 사람들이 증오의 함성을 올리며 자신을 맞아주기를 바란다며 글은 끝난다.
뫼르소가 감정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상대방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다. 장례식에 가야 하므로 며칠 직장에 나올 수 없어 상사의 표정을 살폈다. 상사의 안 좋은 표정을 확인한 후 "제 탓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기에 뫼르소는 바로 후회한다. 상사는 당연히 휴가를 내주어야 함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껄끄러운 동료의 부탁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성격이기도 하다. 동료의 치정사건에 휘말려 결국은 불행을 자초한 샘이 되었다. 뫼르소가 어쨌든 살인자임은 분명하지만 양심을 저버릴 만큼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가식적이라기보다 너무나 솔직한 사람이다. 열심히 일했고 자신의 할 일을 했고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표현했다.
뫼르소는 현재 달리 불행함을 느끼지 않았기에, 보통 사람이 원하는, 똑같은 일상에 다르게 변화를 주는 것 (승진하여 돈을 더 벌고 가정을 이루는 것)에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그런 것에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허무함이 가득한 뫼르소를 주인공으로 하고 까뮈는 '이방인'이라 제목을 붙였다. 뫼르소의 허무하고 무심한 태도가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주입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작가는 총이 등장할 때부터 뫼르소가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고 독자에게 넌지시 암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종종 누군가는 이전에 봐온 사람이 현재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그 상관관계를 들먹일 때가 있다. 재판장의 검사처럼 말이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 놓였느냐에 따라 현재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뫼르소의 장례식에서의 모습과 살인이라는 연결고리를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작가의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지 못하고 총을 겨눈 뫼르소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자신의 죄를 변호해야 하는 처지에서도 마치 남의 말을 하듯 '사람은 누구나 다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는 일이 있는 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지못해 말하는 것처럼 '어머니가 죽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자신의 심리를 정확히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뫼르소 자체가 이방인인 것이다.
뫼르소의 솔직한 심정을 터뜨린 부분에서는 내 속이 다 시원했다. 그로 인해 뫼르소는 해방감을 느꼈고 그제야 사형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부분을 여러 번 읽으며 나와 비슷한 면이 있음을 느꼈다. 세상을 향한 허무와 무심함이 좋은 면에서 담담함으로 포장되었을 때, 그 담담함은 꾹꾹 눌린 감정의 포장일뿐, 그 담담함 속에 갇힌 감정을 폭발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나쁜 면이 드러나는 것이다. 어쩌면 나도 뫼르소의 삶에 대한 태도는 충동적인 살인과 연관성이 있다고 결론지은 것인지 모른다.
이렇듯 뫼르소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무심한 태도와 살인을 저지른 것은 '심리의 공허' 때문이라고 검사는 낙인찍었다.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불리한 상황에 당당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뫼르소에게 왠지 동질감이 느껴졌다. 늘 죽음을 생각하며 이러나저러나 바뀌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뫼르소가 사형수가 되어서야 온전히 실감한 죽음. 누구나 가지고 있는 특권을 나 또한 가지고 있다고 호소하는 뫼르소의 울부짖음이, 죽음 앞에서 이제는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음을 깨달은 뫼르소의 울부짖음이 쟁쟁하게 들리는 것만 같다.
이방인 中
너의 신념이란 건 여자의 머리칼만한 가치도 없어.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없지 않으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것은 너보다 더 강하다.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명확한 의식이 나에게는 있어.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언제나 또 옳으리라.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내가 살아온 이 허망한 생애에선, 미래의 구렁 속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해들을 거쳐서 거슬러 올라와, 그 바람이 도중에 내가 살고 있던 때, 미래나 다름없이 현실적이라 할 수 없는 그때에 나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모두 아무 차이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는가? 너의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생활, 사람들이 선택하는 숙명, 그런 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단지 하나의 숙명이 나를 사로잡고, 나와 더불어 너처럼 나의 형제라고 하는 수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냐? 누구나 다 특권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또한 장차 사형을 받을 것이다. 살인범으로 고발된 자가 어머니의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해서 사형을 받는단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너는 도대체 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