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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에 다녀왔다.

▶ 아직도 모르는 것투성이

by 달자

봄비가 주르륵 내리는 날, 지인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늦은 나이, 하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니 꽃처럼 예뻤다. 나도 저렇게 새하얀 드레스를 입었던 때가 있었는데.



오래간만에 화장을 했다. 아프고 몇 해가 흐르는 동안 내가 다시 화장할 날이 올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 싶던 일들이 하나 둘 마무리가 되고 시간의 힘으로 과거는 아무 일도 아니게 되었다. 조금 남은 아픔은 스르르 눈 감을 때 완전히 사라지겠지. 이제 더 이상 슬프지는 않다. 젊은 날 부질없이 굴렸던 내 생애가 좀 아까울 뿐. 갑자기 차오르는 슬픔은 그저 나이 탓.

얼굴 여기저기 퍼진 기미가 싹 사라졌다. 환하게 웃으니 건조한 주름사이로 분가루가 무늬를 이루었다.




백세시대가 되면서 한 사람과 50년 이상을 함께 산다는 걸 새삼 생각해 봤다. 요즘은 늦게 결혼하는 추세이니 적어도 40년은 부딪히며 살아간다. 나만 같아도 자식 때문에 산다는 말을 수도 없이 뇌까렸는데 지금은 자식도 낳지 않는다고 하니 40년을 무슨 수로 무탈하게 잘 지낼 수 있을까?


사회자가 이벤트 도중, 신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한다. 신부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

나 같으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을까? 갑자기 깜깜해진다. 할 말이 너무 많기도 하고, 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은 사랑이 전부지만 그 사랑이 지나고 남은 빈자리에는 무수한 감정들이 넘쳐날 것이다. 그 감정들을 쳐내고 추스르는 일이 보통일이 아닐 텐데. 그걸 몇 마디 말로 표현이 가능할까?


신부 어머님은 오래간만에 만난 나에게 요즘 남편과 다투고 있는 일들을 넋두리하듯 하소연하신다. 20대 초반에 결혼해서 60년을 살고 계시니 오죽할 말이 많으실까? 남편을 죽을 때까지 데리고(이 표현을 쓰셨다) 살아야 할 막막함이 나에게도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할 말이 어디 아내 쪽에서만 있으랴? 그저 허허 웃으시는 취기 어린 아버님의 얼굴이 해탈한 표정이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흩날리는 회색빛 먼지가 재채기를 일으키듯 싸움의 흔적은 마음에 조금씩 쌓여 생채기를 남긴다.


나는 어떤가?

난 잘 모르겠다. 정말로 내가 남편을 사랑해서 결혼한 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지금 내 마음에 사랑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건지 그것도 모르겠다. 모르는 것투성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과 몇 해를 함께 살을 부딪히며 살아간다는 건 감히 전쟁과도 같은 일이라는 걸 어떻게 설명할까?



pixabay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은 정체되어 있지 않고 어딘가로 흘러간다. 흘러가면서 돌에 걸리기도 하고 누군가의 돌에 맞기도 하면서 변화되고 탁해진다. 단단한 바위가 철썩이는 파도에 시나브로 깎이듯 모든 관계는 처음과 다른 모양으로 바뀌며 이끼가 끼고 질척거려진다. 거기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발목에 힘을 줘야 제대로 서있을 수 있다. 조금만 방심해도 어딘가로 쓸려나갈 부부라는 관계는 서로가 노력해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간다.



사람은 마음에 담아둔 추억이 많으면 훗날 생각할 거리가 많아진다. 그 추억을 되짚으며 환한 미소를 지을 수도 있고 눈물을 훔치며 아픈 미소를 지을 수도 있다. 그 사람과의 거리를 좁히려면 사랑이 넘칠 때 많은 추억을 만드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수 있다.


나의 결혼앨범은 어딘가에 처박혀있고 그때의 비디오테이프는 다 버렸다. 버리는데도 전혀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내가 최고로 예뻤을 순간이었을 텐데도 사는 동안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다. 지나고 나니 힘든 순간을 견디게 하는 건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해결해 나갔을 때 느꼈던 애틋한 추억들이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시련과 충돌을 견디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킬 게 참 많다. 서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일, 싫고 귀찮아도 몸을 일으켜 해야 할 일들, 작은 공간에 보이지 않는 규칙들을 서로 이야기하고 만들어내고 한결같이 지켜가야 하는 현실적인 것들이 문을 여는 순간 대기하고 있다.

훗날 따뜻하게 한 마디 건넬 마음의 여지를 남겨두려면 서로 평등하게, 외롭게 방치해두지 말고, 그때뿐인 말보다 한결같은 의리로 서로를 보듬어줘야 한다.



신부는 지금 온통 사랑일 테니 꽉 찬 사랑을 마음껏 누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사랑이 다른 데로 새지 않고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나중에 필요할 때 꺼내쓸 수 있도록 아주 조금만 남겨두고 여한 없이 사랑하길 바란다. 조금 남은 사랑으로도 40년 이상은 버틸 수 있다.


살다 보면 미움이라는 가시가 박히고 그걸 뽑아내기가 참으로 힘들다. 그 미움을 그나마 줄일 수 있는 건 그 사람과의 추억, 마음 저 밑바닥에 저장해 둔 믿음, 힘들 때 손을 내밀어 준 의리.. 그런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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