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책 이야기

▶ 농담 (밀란 쿤데라)

by 달자

어떤 농담일까?


사회주의 국가 체코에서 살아가는 루드빅은 여느 남학생과 다를 바 없이 피 끓는 대학생이며 마르케타라는 여학생을 좋아한다. 그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여학생 앞에서 더 짓궂어지는 어린 남학생 같은 면이 있다. 루드빅은 좋아하면서 관심 없는 척 더 장난기가 발동하는 모습으로 마르케타를 도발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트로츠키 만세'라는 문구를 엽서의 마지막에 쓰게 된다. 트로츠키는 스탈린과 맞서는 상대로 공산당에 반하는 인물이다. 공산당으로서의 큰 힘을 발휘하는 대학교에서는 이 엽서에 적힌 문구에 대해 추궁하고 루드빅은 마르케타의 반응이 그저 궁금했고 농담일 뿐이라는 것을 잘 이해해 주리라 여겼던 선배 제마넥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결국 당에서 축출당해 탄광으로 보내져 강제노역을 한다. 그때부터 루드빅은 자신을 구렁텅이로 몰아간 제마넥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탄광에서 보내는 루드빅은 가끔 허락되는 외출로 루치에라는 가녀린 여성을 알게 된다. 루치에를 알고부터 루드빅의 어두운 인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루치에가 밝은 여자는 아니다. 루드빅은 그녀를 회색빛 안내자라고 칭한다. 루드빅은 늘 똑같은 허름한 옷을 입고 나타나는 그녀에게 옷을 선물한다. 그 옷을 입은 루치에는 너무나 아름다워 당장 품에 안고 싶어진다. 루치에와의 정사를 꿈꾸는 루드빅은 불법적인 통로를 통해 그녀를 끌고 가지만 그녀는 이미 탄광의 여러 병사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였다. 그것을 몰랐던 루드빅은 그녀가 계속 거부하자 답답한 마음에 루치에를 폭행한다. 이에 그녀는 루드빅도 다른 남자들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닫고 멀리 떠난다. 떠난 그녀를 계속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루드빅은 훗날 루치에의 사정을 알게 되고 깊은 회한에 빠진다.


루드빅의 강제노역이 끝나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무렵 복수의 대상인 제마넥의 부인 헬레나와 만날 기회가 생기고 헬레나는 남편과 다른 루드빅의 다정함에 푹 빠져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다.

루드빅은 복수를 위해 헬레나와 만났지만 제마넥은 헬레나와 이혼 중이라는 사실과 제마넥의 옆에는 새로운 젊은 여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제마넥과 새로운 애인의 만남은 루드빅에게 최고의 굴욕감을 안겨주었고 허무하게 끝난 자신의 복수극은 누군가 자신을 질책하기 위해 못된 농담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때 느꼈을 루드빅의 굴욕감이 작가의 문장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루드빅은 강제노역을 하는 동안 만난 루치에가 삶의 원동력이었고 삶의 모든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잠시 잊게 해주는 존재였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순간부터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그 당시에 느꼈던 루치에에 대한 감정은 진실을 벗어나 어떤 신화적인 존재와도 같았다. 자신의 고독, 사랑,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자신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향한 사람. 하지만 그 사랑은 깨져버렸고 훗날 루드빅은 그녀를 사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와 관련된 것들을 이해하고 그녀 자체에 대한 것을 간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만나고 헤어진 사람 중에는 남에게 향한 사람이 있고 자신만을 향한 사람이 있다. 인류애가 넘쳐 모든 생명을 끌어안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보통은 거의 자기 자신으로 향해 있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상처받는 경우가 많다. 아마 루드빅도 그 젊은 나이에, 그 상황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그런 사람이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마음도 분명 있지만 내 감정이 우선인 사람은 상대방의 상처가 쉽게 느껴지지 않고 알아야겠다는 마음조차 갖고 있지 않다.


부모의 폭력과 뭇 남자들의 폭력에 한껏 주눅 든 루치에 또한 상처가 깊은 인물이다. 서로의 상처를 보지 못했던 두 사람의 엇갈린 사랑은 책을 덮고도 한참이나 여운이 남았다.



발췌

◸인간은, 균형을 갈구하는 이 피조물은, 자신의 등에 지워진 고통의 무게를 증오의 무게를 통해서 상쇄한다. 그러나 이 증오를 순수히 추상적인 원리들, 불의, 광신, 야만성에 집중시켜 보라! 아니면 당신이 인간의 원리 자체마저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면, 인류 전체를 한번 증오해 보라! 이런 증오는 너무나 초인간적인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분노를 (인간은 이 분노의 힘이 한정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가라앉히고자 할 때 결국 분노를 한 개인에게만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법이다.

나의 공포는 거기에서 온다. 이제 제마넥은 언제든 자신이 변했음을 선언할 수 있고, 내게 용서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게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무어라 말할 것인가? 무어라 대답할 것인가? 그와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그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화해한다면 나의 내적 균형이 일시에 깨져버리리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면 내 내면의 저울의 한쪽이 단번에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리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를 향한 나의 증오가 내 젊은 날에 닥친 고통의 무게와 평형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가 이런 고통을 초래한 악의 화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그를 반드시 증오해야만 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문구를 한참 꼽씹어봤다. 인간은 여러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살다 보면 증오심은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인데 형체가 없는 증오심은 결국 어떤 한 개인으로 향하며 어떤 형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 형체, 나의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그 형체는 증오가 발생하는 시기부터 지금까지 쭉 변하지도 않고 옛날 모습 그대로 나와 살아가고 있다. 그 형체는 지금 변했고 많이 달라졌음에도 우리는 예전 그대로 재생 반복하며 미워하고 증오한다. 그 증오심을 이제 버리라고 하면 수년동안 채워있던 그 공간은 텅 비어버리게 된다. 그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상실감은 또 다른 무언가로 채워지고 그 관성대로 사람은 그것이 운명인 것처럼 살아가게 된다. 그런 균형을 말한다면 참으로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루드빅이 15년 동안 여러 가지 상황들을 가정하고 꿈꾸었던 일들이 한순간 허무하게 끝났을 때, 자신의 굴욕적인 모습과 갑자기 나타난 루치에의 무심한 모습과 오랜 전통을 지키려고 애쓰는 고향 친구와의 만남이 하나로 어우러져 화려한 치장도 겉치레도 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자신을 반기는 고향에 돌아와 맞닥뜨린 쓸쓸함과 고독감이 눈물과 범벅이 되며 이 소설은 끝이 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이 소설이 현재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인 것처럼,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의 사랑이야기인 것처럼 가깝고도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 루치에가 자꾸 아른거린다.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살아오는 동안 느꼈을 공포, 외로움, 억울함을 꾹 참고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과 그녀의 감정이 머릿속에 그려져 마음으로 전해졌다.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봤을 감정들.


그리고 내가 보는 관점과 상대방이 보는 관점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 내가 누군가에게 베푸는 선행은 상대방을 위한 마음도 있지만 아주 깊은 밑바닥에는 비겁함과 증오심도 있다는 것, 내가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환상을 막상 들춰내 파헤쳐보면 한심한 모습일 때가 많다는 것.


작가가 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문장들은 루드빅을 통해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바로 옆에서 꾸짖는 것처럼 느껴졌다.



발췌

내 인생의 모든 일들을 전부 취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일들을 초래한 실수들이 내가 한 실수들이 아니라면 무슨 권리로 내가 그것을 취소할 수 있겠는가? 사실, 내 엽서의 농담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을 때, 잘못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이런 실수들은 너무도 흔하고 일반적인 것이어서 세상의 이치 속에서 예외(잘못)도 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순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잘못한 것이란 말인가? 역사 자체가? 그 신성한, 합리적인 역사가?

그런데 왜 그런 실수들이 역사 탓이라고 해야만 할 것인가? 인간으로서의 나의 이성에만 그렇게 보일 뿐, 만일 역사가 자기 고유의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 이성이 인간들의 이해를 신경 쓸 것이며 여선생처럼 꼭 진지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만일 역사가 장난을 한다면?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나를 넘어서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완전히 무화시켜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끔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아주 작은 실수(또는 선택)가 커다랗게 나를 옭아맬 때 정말 간절하게 아무 일도 없던 때로 말이다.




인생은 변변찮은 큰 농담이라고 베르베르가 어느 소설에서 말했었다. 그저 농담 같은 인생, 농담으로 흘려듣고 말아 버려라.


그러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 다시 시작하는 거다.

마음속 감정쓰레기는 그저 필요 없는 농담일 뿐이라고.



출처 : 네이버도서 (1965년 12월 5일에 글을 마침)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도 아직 독립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