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감정은 진화하지 않는 걸까?
내게 주어진 시간이 온전히 나를 향한 시간이기를 바라는 욕심이 강해진다.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부담감, 누군가를 걱정하고 아파하는 근심들은 이제 그만두고 싶다. 평생 짊어지고 사는 걱정덩어리들, 자유 박탈감, 갖고 있는 패를 빼앗긴 느낌, 나는 요즘 그런 것들 때문에 마음이 복잡하다.
간절하게 하고 싶은 것도 없으면서 자유를 얻기 위해 몸부림치고, 강제적으로 부여된 책임을 지기 위해 정확한 시간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 그 시간에 내 자유를 빼앗긴다는 압박감, 그 비자발적이고 수동적인 무게감 때문에 고달프다. 달리 생각하면 되는 걸, 난 또 머리가 깨지도록 잡생각에 빠져있다. 그게 감옥이 아니고 뭘까.
도망가고 싶다.
가깝게 도서관이 있다는 건 나에겐 복이다. 작은 도서관에는 이미 고인이 된 작가의 오래된 책들이 수두룩하다. 갈라지고 찢어지고 밑줄이 쫙쫙 그어진 여러 사람의 손때가 묻은, 작가들의 분신과도 같은 책들을 이리저리 만지다 보면 쩍 갈라진 틈으로 작가의 영혼이 스르륵 피어오를 것만 같다. 누르스름하게 변질된 종이에 그을린 듯하면서 뚜렷하게 살아있는 글자들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내적 친밀감이 아지랑이처럼 내 주위로 번진다. 이미 고인이 된 작가를 내가 다시 이승으로 불러들이는 듯해서 코끝이 찡해진다.
그 오래된 소설 속에는,
뻔한대도 궁금한 사랑이야기, 오밀조밀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가 마치 뜬소문처럼 소곤소곤 다가온다. 가족 중에 이모가 출현하면 그 이야기는 나에게 있어 반 이상 성공한다. 이모는 엄마나 언니와는 또 다른 존재이다. 이모는 영원한 내편이다. 서로 말 못 할 비밀까지도 공유한다. 이모는 사랑에 울고 웃는 반 미치광이다. 주인공은 이모를 통해 인생을 배운다. 그래서 주인공과 이모는 함께 성장한다. 나에게도 그런 이모가 있었다면 인생이 훨씬 풍요로웠을 것이다.
어느 동네의 한 지붕, 여러 사람들이 바글바글 나오는 소설은 다채롭고 재미있다. 세계를 막론하고 어쩌면 그렇게 인간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똑같으면서 다양한지. 들뜬 과부, 속물 같은 선생님, 야망으로 가득 찬 다방 레지, 순수함의 탈을 쓴 바람둥이들, 어쩔 수없이 아이 낳고 사는 이름마저도 순해빠진 여자들, 그 여자는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가지도 못하는 불쌍한 여인네이다. 도망가지 못하는 신세가 나랑 똑같아서 동질감이 느껴진다. 가장 불쌍한 인물에 나를 대입시키고 억지로 눈물을 쏟는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인간답게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이렇듯 다양한 군상들은 구겨지고 빛바랜 얇은 종이 위에 눌려 있다가 내가 문을 열면 묵혀있던 냄새를 풍기며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 바쁘게 움직인다.
질긴 인연 속에 사랑하고 배반하고 또 사랑하고 이별하고 울고 불고 치고받고 싸우는, 오래된 소설인데도 마치 어제 일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건 똑같다.
세월은 끊임없이 흐르고 인간의 삶과 죽음 또한 반복되고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인간의 감정과 그 감정으로 인해 발생되는 사건들은 아주 옛날이나 수 십 년이 흐른 지금이나 뒤죽박죽 엉망진창이다.
인간은 부대끼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일까? 인간은 사랑과 배반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이면 으레껏 따라다니는 속성인 양면성, 여러 가면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한 가지 속성만 가지고 태어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난 어떤 속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려나? 좀 섬찟하기도 하다.
내 주변의 사람이 늘어날수록 관계가 복잡해지듯이 인구가 늘어나면서 인간은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고 이에 얻어지는 건 결국 사람과의 관계를 극복하기 위한 지혜였을 것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 낸 여러 가면들은 하얀 가면도 있을 것이고 검은 가면도 있을 것이다. 난 아마도 회색 가면이 많지 않을까? 하얀 가면만 쓰고 다녔다가는 진즉에 속 터져 죽었을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선함과 악함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 중에 사소한 한 가지다. 그것 때문에 느끼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진정시킬 사람은 나뿐이다.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들에 이리저리 휩쓸리다 보면 진이 빠져버린다. 내가 주체적으로 삶을 살겠다고 해놓고 이렇듯 주체 못 할 감정의 노예가 되다니. 남이 해주는 밥상에 몸 둘 바를 모르면서 막상 내가 하려 하니 뭔가 손해 보는 듯한 그런 감정, 내 시간을 빼앗기는 듯한 감정, 그런 감정이 자꾸 솟는 나 자신이 왠지 못된 사람인 것 같다. 타인을 위한 시간을 배우고 즐기자고 어제까지 다짐하고 오늘 와서 깨버린다.
마음이 문제라더니, 좁아터진 마음속에 구불구불 복잡한 미로가 끝도 없이 뻗어있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인생이 하찮아질지, 괜찮아질지는. 질겨서 끊어낼 수 없는 독한 감정들을 가위로 싹둑 잘라내면 좋으련만.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나에게 '자유를 달라' 허공에 대고 구걸하고 있다.
20대 자식들, 50대의 나, 60대 남편, 80대 친정부모, 90대 시아버지, 한창 열심히 살 청년이나 죽음이 가까운 노년이나 인생은 영원히 알 수 없는 무언가이다. 정답이 뭔지 끄적거린 것들을 싹 다 지우고, 알려고 애쓰지도 말고 그냥 지금을 살아가는 거다. 나는 이미 뭐가 옳은 지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