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민, 바람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부모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사무치게 맞는 말일 때가 많다.
나의 분신이며 나의 꿈, 나의 자랑, 나를 살게 하는 동기이며 나의 젊음을 한번 더 상기시켜 주는 존재.
때로는 부드럽게 부모를 다룰 줄 알고, 때로는 거칠게 외면할 때도 있는 제 기분 내키는 대로 하는 가까우면서 먼 존재.
오래전, 외국에 사는 시누이에게 어린 자식들을 보냈었다. 사람에, 장사에 지친 나는 두 말없이 남편의 의견에 따라 서둘러 진행시켰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시누이는 둘째 아이가 돈을 훔친다고 전화를 했다. 아! 철렁.
전화기를 통해 느껴지는 기죽은 목소리, 가끔 보러 가면 보였던 그늘 진 얼굴, 그 모습을 뒤로한 채 떠나올 때는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박힌 듯 먹먹했다. 축 처진 어깨의 뒷모습은 아직도 뇌리에 선연하다.
삼 년 후 아이가 돌아왔다. 아이는 돌아오는 내내 많은 기대를 했으리라. 부모가 있는 집으로 오고 싶은 마음이 전화선을 통해 뼛속 깊이 전해졌었다.
아이의 짐을 정리하며 옷가지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먼지와 섞인 구겨진 쪽지를 발견했다. 그 쪽지에는 돈을 훔치는 방법과 여러 개의 방을 어떻게 통과해야 하는지 동선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순간 그 쪽지가 저주에 걸린 부적 같아서 손이 떨리고 눈앞이 캄캄해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마구 구겨버렸다. 그 쪽지는 시누이집에서 하숙을 했던 나이 차이가 꽤 있는 형이 쓴 것이었다. 그동안 그 형에게 시달렸었구나 생각하니 분노가 치솟았다. 시누이는 알았을까?
하지만,
난 차마 시누이에게 말하지 못했다. 왠지 그 사건을 들춰내기가 겁이 났다. 아이를 제대로 돌봐줘야 했을 사람은 보호자였던 시누이였음에도 왠지 내가 했어야 할 일을 떠넘긴 듯한 (아이를 보낼 때의 내 심정은 더 나은 교육보다 책임회피에 가까웠다) 느낌이 더 커서 마음껏 내 자식을 두둔할 수 없었다.
그 이후, 어린 아들의 속내는 더 이상 들여다볼 수 없었고 그 일은 지금까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나를 콕콕 찔러댈 때가 있다.
부모는 자주 아이에게 힘든 일이 있으면 서슴없이 말하라고 한다.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고 자식은 부모의 마음에 부응하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한다. 아이의 마음은 그저 아이가 아니다. 아이는 자신이 쏟아낼 말들이 행여 잘못된 결과를 낳을까 조심하는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다. 그 어른스러운 구석이 자기 방어와 부모의 반응을 미리 점쳐보느라 서슴없는 대화로 이어질 수 없다. 부모가 온전히 내 편이라는 생각은 이미 물 건너간 뒤였다.
내가 보지 못한 그 상황, 분위기, 두려움, 그 속에서 뭔가를 선택해야 했을 아이의 마음이 어땠을지, 지금은 어떤 생각으로 변했는지, 아니면 가슴속에 그대로 찝찝하게 남아있는지 탈탈 뒤집고 털어서 속속들이 알고 싶지만 지금까지도 그 사건은 나도 남편도 정확히 모른다. 시누이에게 따져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성인이 된 지금, 아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때 그 시절, 아이들의 세계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기는 힘들다. 부모의 품을 벗어나 혼자 겪었을 마음의 갈등과 시련이 많았을 것이다. 얼굴의 표정, 목소리가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떠넘기듯 보낸 잘못된 선택과 멀리 떨어져 그저 잘 살겠거니 했던 초조함은 온전히 죄책감으로 남았다. 아이는 힘들다는 한마디조차 꺼내지 않았고 그 형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일절 말이 없다.
집중할 수 없는 불안한 공간과 사람들 때문에 아이는 공부는커녕 하루하루가 힘들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음에도 말 못 했을 그 어린 아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큰 딸은 친구들의 따돌림 때문에 도망치듯 보냈는데 둘째 아이에게는 오히려 못할 짓을 하게 되고 말았다. 같이 지냈던 첫째 딸 또한 동생까지 돌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둘 다 너무 어렸다.
아이를 여러 명 낳는다고 해서 다음에는 더 잘 키울 수 있겠지 싶은 말은 다 헛소리다. 아이마다 쏟아부을 에너지는 각기 다른 것들로, 처음과 다를 바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독립시켜야 할 성인이 된 아들을 위해서 이제 죄책감은 떨쳐내야 하건만 마음은 늘 오래전 어린 아들의 애처로운 모습만 떠올라 어디가 조금이라도 아프거나 필요한 것이 생기면 내 마음은 벌써 설레발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싶은, 나 편하자고 하는 마음이다. 그 죄책감은 단단하게 잘 다져놓은 둑을 한 순간 무너져 내리게 할 만큼 지독하다.
살아가며 만들어가는 자신의 가치관이 나이 많은 어른이라고 해서 다 옳은 건 아니므로 아들이 앞으로 세상을 겪으며 차곡차곡 쌓이는 가치관은 정의롭고 떳떳한 것이라면 좋겠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달라지는 요령 좋은 사람도 있는 반면 너무 고지식해서 답답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성격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천차만별 가지각색 인간이 뒤섞인 이 세상에서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마음의 중심을 잘 찾아서 건강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꽉 닫힌 벽에 갇혀 부정적인 생각들의 포로가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부질없는 생각들이 세상살이에 하등 필요 없는 것임을 하루라도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이제야 조금씩 깨우치는 나처럼 너무 늦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깨우친다고 완치되지도 않고 죽을 때까지 덜어내며 살아야 하는 고통이지만 마음의 창문은 활짝 열어두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고작 삼 년이었는데 그 삼 년이 모든 문제의 원인인 것처럼 살아가는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 내 탓이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책임을 묻고 싶은 원망이, 사실 아들의 문제도 분명 있을 테지만 남 탓으로 돌리고 싶은 나의 속내를 들키기 싫어서일 거다. 내가 힘든 이유는.
부모가 물심양면 잘 키웠어도 자식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모로서, 처해 있는 상황에서 객관적인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주기는 참으로 어려울 때가 많다. 지금의 선택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내 모습이 과연 올바른 행동인지 무수한 의문들 속에서 현재를 살아간다. 모든 선택은 강제가 아닌 본인의 선택으로 이루어져야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나와 자식들이 서로 잘 독립해서 자식은 자식대로 나는 나대로 잘 살아내는 것, 죽을 때까지 믿고 따를 떳떳한 가치관을 가지고 잘 살아가는 일이 제일 큰 과제이고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