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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 분홍, 먹물 그리고 사랑.

by 달자

요즘 분홍색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어린 여아들이 유독 좋아하는 색이기도 하고 화려한 분홍색은 자신의 노화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끌리는 색이라고들 한다. 검은색 옷이 많은 나도 이렇게 분홍색이 마냥 좋은 나이가 되었나 보다. 그 마음이 이해가 돼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남편은 한치를 잔뜩 들고 왔다.

늘 오징어라고 칭하는 종류에는 보편적인 오징어가 있고 갑오징어 그리고 한치가 있다. 오징어는 몸통과 다리의 비율이 적당하고 막 잡은 것은 옅은 분홍빛이 돌아 영롱하기까지 하다.

한치는 비닐 같은 얇은 뻣뻣한 뼈가 있어 잘 손질해야 음식 먹을 때 씹힐 일이 없다. 갑오징어는 몸통에 정말 딱딱한 갑옷을 장착하고 있어서 정신없이 만졌다가는 피를 볼 수 있다. 다른 것과 다르게 먹물도 많고 갑옷도 두꺼워서 연약한 손에 얼룩과 상처를 남긴다. 단단한 몸에 짧은 다리는 다른 오징어와 달리 질기고 버릴 것도 많아서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맛도 그저 그렇고. 쫄깃한 식감은 오징어가 제일 괜찮고 부드러운 식감으로는 이가 부실한 사람에게 좋은 한치, 질기고 맛도 잘 우러나지 않는 갑오징어. 나의 솜씨 탓도 있겠지만 갑오징어는 하여간 별로다. 갑오징어는 훈련으로 단련된 근육덩어리 무사와 같은 느낌이랄까!


이렇듯 사물도 여러 종류가 있고 그 흔한 사랑도 여러 종류가 있다. 모든 움직이는 것들은 언젠가는 생명이 다하고 사랑도 처음의 걸쭉하고 짙은 농도에서 연하고 부드러운 또는 친밀한 농도의 사랑으로 변해간다.




일주일 동안 남녀의 사랑에 관한 소설을 읽었다. 예전에 읽다 포기한 고전을 다시 읽어보려고 용쓰다가 집중력이 쫓아가지 못하고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어서 이렇게 힘들게 읽는 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으쓱대며 독서가 취미라고 우겼던 나에게 흡수된 철학적 사고가 너무 얕구나 싶은 생각에 더더욱 읽기가 싫어졌다. 그래서 마음도 식힐 겸 가벼운 소설로 골랐다.

그래서 택한 사랑이야기는 나를 좀 편하게 해 줄 줄 알았다. 나같이 감정이 팔랑팔랑한 성향은 사랑이야기를 읽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 나이에도 감정이 살아있구나 싶을 정도로 감정이입이 잘 돼서 주인공들을 놓아줄 수가 없었다.

평범한 사랑을 하는 우리와 달리 소설은 평범하지 않다.

내가 사랑이라고 느낀 감정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소설이 사랑에 대한 가치를 다시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읽으면서 내가 쭈욱 살아온 어느 한 지점, 과연 사랑 때문에 베개를 적셔가며 울었던 적이 있었나? 하루 종일 보고 싶은 연인 생각에 안달하며 몇 날 며칠을 허우적거린 적이 있었나?


pixabay


어쨌든 현실은 돈 많은 전신마비 환자와의 사랑은 있을 수도 없으며 너무나 사랑해서 죽은 남자를 먹어치우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 설정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 사랑이야기에 감정이 쉽게 이입되는 과정은 작가의 문장이다. 감정을 묘사하는 작가의 입체적인 문장이 독자의 마음을 후벼 파는 것이다.

문장이 주는 그 뻐근함에 난 한동안 가볍게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주인공들이 마치 내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울고 웃었다. 작가의 손에 목숨이 달린 허상인데도 쉽게 떨치지 못했다.


나도 주인공처럼 달라지고 발전하는 모습이고 싶고 정말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하게 누군가를 아껴주고 희생하고 기다리는 그 감정을 느껴보고 싶기도 한, 평범함이 아닌 특별한 감정을 다시금 느끼고 싶어서 현실의 내가 초라한 느낌까지 들게 했다. 소설 속 그들은 불행한데도 말이다. 사랑 때문에 놓아줄 수 없는 그 질긴 끈이 내 가슴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하루를 겪으면서 느끼는 화와 짜증이 밥 하기 싫어서, 설거지가 힘들어서, 청소가 귀찮아서가 아니라 정체되어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이 점점 쌓이고 커져서 불행한 느낌으로 확장될 때가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크게 불행하지도 않은데도 불만이 불행한 감정으로 돌변한다. 차곡차곡 쌓인 불만이 터져 나올 때 하늘이든 땅이든 홀연히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다. 어디론가 사라져서 나라는 존재는 아예 없고 다시 태어나고 싶은, 지금보다 더 나은 나로 다시 환생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쩌면 생각하고 상상하는 인간이 겪는 부작용일 수도 있겠다.


잔뜩 화를 내고 미안해서 겸연쩍어하는 나 자신이 못나보여서 반짝이가 잔뜩 붙어있는 시엄니가 입던 화려한 분홍색 웃옷을 꺼내 입고 산책을 나갔다. 장롱에는 시엄니가 마음껏 입어보지도 못한 알록달록한 옷들이 여전히 깨끗한 채로 걸려있다.

잠깐 나갔다 오는 길도 늘 화장하고 예쁘게 꾸미고 다녔던 그 마음이, 왜 전화하지 않냐고 역정을 내시던 시엄니의 그 속뜻이, 너무나 절실하게 느껴졌다.

누구나, 나이 불문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고, 열렬히 사랑하고 싶은 감정은 없어지지 않고 내재되어 있으며 그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했던, 사랑이 전부였던 그 황홀했던 순간을 추억하고 어느 순간 기대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머리는 소설의 여운에 취해 둥둥 떠다니고 현실은 오징어 먹물에 물들어 까맣게 물든 손톱 때문에 짜증이 나는 그렇고 그런 시간을 답답한 미로 같은 공간으로 흘려보내고 있다.


pixabay


- 미 비포 유(조조 모예스)中 -

당신 안에는 굶주림이 있어요.

두려움을 모르는 갈망이 있어요. 대다수 사람이 그렇듯, 당신도 그저 묻어두고 살았을 뿐이지요.

대담하게 살아요, 스스로를 밀어붙여요. 안주하지 말아요.


- 구의 증명(최진영) 中 -

함께 하던 어느 날 구와 나 사이에 끈기 있고 질펀한 감정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우리의 모난 부분을 메워주는 퍼즐처럼, 뼈와 뼈 사이의 연골처럼, 그것은 아주 서서히 자라며 구와 나의 모나고 모자란 부분에 제 몸을 맞춰가다 어느 날 딱 맞아떨어지게 된 것이다.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하겠네.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다만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랑에 가까운 감정. 우리 몸에도 마음에도 그것이 들러붙어 있었고 그것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너 아닌 그 어떤 너도 상상할 수 없고, 사랑할 자신도 없다. 이승에서 너를 사랑했던 기억, 그 기억을 잃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나를 기억하며 오래도록 살아주기를. 그렇게 오래오래 너를 지켜볼 수 있기를. 살고 살다 늙어버린 몸을 더는 견디지 못해 결국 너마저 죽는 날, 그렇게 되는 날, 그제야 우리 같이 기대해 보자.

너와 내가 혼으로든 다른 몸으로든 다시 만나길. 네가 바라고 내가 바라듯, 네가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은 후에, 그때에야 우리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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