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픈 짐승 (모니카 마론)
모니카 마론은 내 어머니와 같은(1941년) 연세의 작가이고 동독 사회주의 작가였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역사적 사건을 바로 옆에서 겪었으며 통독 직후를 '기이한 시대'라고 소설에서는 지칭했다.
이 기이한 시대의 소설 속 화자인 '나'로 지칭되는 그녀는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는 고생물학자이다. 박물관에는 고대 거대한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뼈대가 전시되어 있고 그녀는 매일 그 공룡 앞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만큼 공룡을 많이 생각하고 사랑한다.
1억 5천만 년 전에 살았고, 누군가에 의해 발견된 뼈대를 통해 공룡이라 칭하고 이에 연구자들은 공룡의 생김새, 공룡의 먹이, 공룡의 삶과 죽음을 만들어냈다. 지금 현재 사람들은 공룡이 있었다는 것을 연구자료에 의한 것 외에 실제로 본 적이 없는 1억 5천만 년 동안 몰랐던 공룡을, 이제는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그렇게 거대한 생물이 어떻게 존재했으며 왜 지구상에서 사라졌는지, 지금 살아가는 인간과 어떻게 밀접한 연관이 있는지, 사람들은 크게 관심이 없다. 오로지 아이들만이 오래전에 실제로 존재했던 상상 속의 공룡 자체를 좋아할 뿐이다. 공룡 자체도 꾸며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아무도 공룡을 실제로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상당히 평균적인 삶을 살아가는 여자였다. 결혼도 했고 딸도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어떤 발작증상이 일어났고 잠깐 동안 정신을 잃고 깨어난다. 그녀는 이 현상을 신이 나에게 죽음에 대한 가상실험을 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자연과학자로서 그녀는 큰 혼란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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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가 그 이전부터 스스로 질문을 제기하고 나 자신이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어떤 신호를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 질문은 '만일 그날 저녁의 발작이 내 죽음을 가상실험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말로 그때 내가 죽었다면 내가 놓쳤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라는 것이었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그것이 대답이었고, 그 문장을 마침내 말로 꺼내 얘기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의 사랑, 프란츠를 공룡 앞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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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아름다운 동물이라는 그의 말에 마치 신탁을 받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그렇죠, 아름다운 동물이죠"라고 대답하도록 나 자신에게 허용할 때면 언제나 그때처럼 아름다운 음악이 크게 울려 퍼졌다. 빛처럼 유리 천장을 뚫고 떨어지는 것 같은 음악이 홀 전체의 구석구석에서 메아리치며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뼈대를 떨게 만든다.◿
프란츠 또한 가정이 있는 남자다. 개미연구가이다. 프란츠는 그녀를 갈구하지만 밤 열두 시 반이 되면 어김없이 아내 곁으로 간다. 아내 옆에서는 평범한 남편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 개미처럼 말이다. 개미의 체계적인 시스템을 생각한다면 프란츠는 바로 조직화된 어떤 틀을 깰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그를 좋아하는 그녀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여러 문장을 통해 표현했다.
급작스레 찾아온 사랑의 감정을 거의 백 살에 가까운 나이에도 그녀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감정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랑을 자신과 떼어놓고 이 감정이 어떤 존재인지 표현된 문장들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과거이며 그녀의 기억을 토대로 이야기하므로 일어난 사건도, 순서도, 나이도 , 날짜도 정확하지 않다. 마치 오래전에 존재했던 공룡을 거슬러 기억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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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백 살인지 아니면 겨우 여든 살인지는 아무 상관없다. 우리가 '나는 사랑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상태에 빠져들 때 원래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 사십 년이 되었는지, 아니면 삼십 년이나 육십 년이 되었는지도 상관없다. 앞으로 오십 년 더 머리를 굴려본다 해도 그것에 대해서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칩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 가끔은 사랑이 어떤 다른 존재처럼 우리 안으로 침입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몇 달 동안, 심지어 몇 년 동안이나 주위에 숨어 우리를 엿보다가 어느 때인가 기억이나 꿈들의 방문을 받고 우리가 갈망하며 숨구멍을 열 때, 그때 그것이 숨구멍을 통해서 순식간에 밀고 들어와 우리의 피부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과 뒤섞인다.
사랑을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아직 교화되지 않은 존재, 젊음이다. 노인은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에 맞서 다양한 감정들을 고안해 낸다. 동물 사랑, 어린이 사랑, 자연 사랑, 일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 인간애, 음악애호, 일반적인 예술애호...
교화된 인간은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사랑한다. 나에게는 그것이 쉬웠다. 프란츠를 만나기 전 나는 그 영원한 브라키오사우루스를 사랑했다.
프란츠를 처음 만났을 때 내 사랑은 자유를 얻었다. 처음부터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내 사랑이 결정했다. 프란츠와의 문제에서 내가 아주 작은 것이라도 결정을 내린 기억이 없다. 내 사랑이 그것을 내게 금지했던 것은 아니지만 첫 순간부터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 사랑이 나를 대하는 확신이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는 했지만 사랑의 강요에 대해 저항하려고 오래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랑을 자제하도록 하려는 나의 시도들은 번번이 모두 사랑의 승리로 끝났고, 매번 사랑의 계획에 복종해야 할 뿐 다른 것은 없다고 가르치며 또다시 더 큰 굴욕만을 내게 남겼다.
청춘의 사랑은 단순히 젊은 시절에 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다. 청춘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견주어 잴 수 있을 어떤 것도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유일하게 그 사랑 자체를 위해서 존재한다.
그것은 아직 실망을 극복할 필요도 없고 이전의 행복을 능가하지 않아도 되고, 그 무엇도 반박하거나 수정하거나 대체하지 않아도 된다.
프란츠와 함께했던 시간은 내게 있어서 시간을 초월한, 어떤 숫자도구에 의해서도 정렬되지 않는 시간으로 남았고, 나는 그 이후로 바람이 통하는 어떤 공의 내부에서 살듯 그 시간 속에 살고 있다.◿
프란츠가 밤 열두 시 반에 가겠다고 나선 날, 프란츠는 사고를 당한다. 그녀가 가지 말라고 붙잡는 사이, 사고인지 그녀가 죽인 것인지는 그녀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는 외부세계를 차단하고 오로지 프란츠와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이야기를 꾸며나간다. 그 일들이 사실인지 사실이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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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가 나를 떠나고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그를 기다리게 된 이후에야 비로소 나는 내 사랑과 융화하여 살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내 사랑과 나를 구분하지 않으며, 그 이후로 내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내가 원했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공룡과도 같아서, 모든 세상이 그들의 죽음을 즐긴다. 트리스타과 이졸데, 로미오와 줄리엣, 안나 카레니나, 펜테질레아, 항상 죽음만이 있고, 항상 불가능한 것에 대한 쾌락이 있다. 사람들이 핑계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에 무능력하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청춘의 사랑이 없는 불행한 영혼들에 의해서, 언제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일찍 죽음의 공포 속에서 소리치면서 그들의 사랑을 몸 밖으로 내보냈던 불행한 영혼들에 의해서 그렇게 믿도록 설득을 당하는 것이다.
프란츠에 대한 내 감정의 억제할 수 없는 성질이 공룡성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문명적 규범을 무시하면서 그렇게 사랑했던 것이 내 안에 있는 공룡성, 원시적인 어떤 것, 격세유전의 폭력성이었다는 것을 이해했던 것이다. 언어를 필요로 하는 어떤 것도 프란츠에 대한 내 사랑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음울한 성향의 소유자였다. 행복을 동경했지만 동시에 무시했다. 기이한 시대였고 전쟁을 겪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분노를 보며 자랐다. 전쟁은 부모에 대한 모순된 인간상을 그녀에게 심어주었고 행복은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평범한 삶을 살지만 그 안은 아주 황량하고 무의미했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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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년 전이나 오십 년 전 그날 저녁, 내 연인이 곧게 편 등을 벽에 기대고 식육동물들(침대시트의 그림)에 둘러싸여 내 침대에 앉아 있던 그 저녁을 나는 그가 떠나간 이후로 꾸며내고 있다. 내 연인과 함께했던 다른 많은 밤들도 역시 모두 꾸며내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도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일어났던 일과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을 구분하는 것이 내게는 힘이 든다. 그 많은 세월 동안 나는 가능한 모든 일을 일어났던 모든 일과 혼동하고 조합했으며 생각했던 것을 말했던 것과, 미래의 일을 절대 잊지 못할 일과, 기대하는 일을 두려운 일과 혼동하고 조합했는데, 그래도 항상 똑같은 이야기였다. 끝은 명확하고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 끝은 수정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끝을 잊었다.◿
소설이기에 망정이지 현실에서는 집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오로지 사랑이라는 주제만 놓고 읽는다면 충분히 가능할 정도로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느 틈으로 들어와 한 사람의 인생을 구원할 수도, 망칠 수도 있는 요망스러운 감정임에는 틀림없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녀가 추구하는 사랑은 절대 불변의 사랑, 죽음도 불사하는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 사랑에는 희생은 없다. 둘이 추구하는 사랑이어야 한다. 서로 하나가 되는 사랑, 절대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는 사랑, 독차지해야 하는 사랑이다.
처음 공룡을 올려다보고 사랑을 알아챘듯이 한 곳을 바라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랑에서 점차 퇴색되고 소유하려는 사랑으로 변질되었을 때 그녀의 사랑은 혼자 하는 사랑이 되었다.
개미의 일탈은 곧 죽음이다. 프란츠는 절대 아내를 버릴 수 없도록 어머니로부터 교육받았고 개미의 세계를 경배한다. 그만큼 자신이 이룬 가정도 지켜야 하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이다.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그녀가 불변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 자체도 모순이고 어떤 계기로 인해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것이 사랑이라 쳐도 이건 너무나 모순적인 사랑이다. 그녀의 사랑은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 것'이었다. 어떤 모양으로든 변하기 마련인 사랑을 혼자만의 세상 속에 영원히 가두어버렸다.
프란츠가 곁에 없는 생애동안 그녀는 '그'만을 생각하고 기억하고 그와 사랑을 나눴던 침대에 누워 슬픈 짐승처럼 처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경지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사랑이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아직도 의아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경지에 있는 사랑을 갖고 싶다고 붙잡을 수도, 싫다고 쫓아낼 수도 없어 인간은 사랑에 울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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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틀어박혀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엔가 우리가 충분히 저항력이 떨어지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때 불치의 병이 되어 터져 나온다. 그러나 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사랑이 죄수처럼 우리 내부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사랑이 해방되어 우리들 자신이 감옥을 부수고 나오는 데 성공하는 일은 가끔씩 일어난다. 사랑이 감옥을 부수고 나온 종신형 죄수라고 상상해 보면, 얼마 안 되는 자유의 순간들에 사랑이 왜 그렇게 미쳐 날뛰는 것인지,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온갖 약속 안으로 우리를 밀어 넣었다가 곧바로 온갖 불행 안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를 가장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사랑을 내버려 두기만 하면 사랑이 무엇을 줄 수 있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사랑이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벌을 받아 마땅한지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사랑은 불륜이다. 엄연히 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녀의 사랑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 사랑에 눈이 멀어 자신을 고립시키는 방법이 너무나 처참해서 왠지 그녀의 편을 들어주고 싶고 프란츠가 미워지기까지 한다.
그녀가 인생에서 놓칠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하여,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하여 그렇게 집착했던 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던 사랑을, 망각의 자유를 거부하고 기억을 끄집어내서 서서히 죽음으로써 불멸의 사랑을 완성시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라진 공룡은 인간이 기억해 냈는데 그녀의 사랑은 누가 기억해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