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무더위를 걱정했는데 퍼붓는 비의 높은 습도로 눅눅한 하루가 되었다. 뽀송하지 않은 빨래, 축 쳐진 머릿결, 뻣뻣한 손마디, 어깨결림, 어쨌든 날씨와 내 몸, 내 기분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비가 한껏 쏟아진 새벽 공기는 쾌청하면서 고요하다. 그 느낌을 오래도록 느끼고 싶어진다. 고요 속에 들려오는 다양한 새들의 수다스러움에 오히려 마음은 차분해졌다. 잠결에 들려오는 새소리가 아침이라고, 일어나라고 속삭인다. 잠결의 유혹에 몸을 움츠렸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블라인드를 드르륵 올리고 쭈욱 기지개를 켠 후 세수를 했다. 밤새 뻑뻑해진 눈두덩을 꾹꾹 눌러 조금씩 풀어주고 잔뜩 짓이겨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고 굳어있는 얼굴을 쫙 펴보았다.
오늘 아침은 꿉꿉한 날씨에 쇠해진 기분을 달래고 허한 뱃속에 두둑함을 채워주기 위해 닭다리를 삶아 감자를 넣고 닭곰탕을 해 먹었다. 뿌옇게 스며 나온 닭육수와 감자의 조합이 시각적으로도 건강한 조합이다. 적당히 간간한 만족스러운 첫 한술을 위해 정갈한 마음으로 집중력을 끌어모았다. 고독한 노년기는 뜨끈한 밥 한술이 폐를 거쳐 뱃속으로 들어가야 하루를 버텨낸다.
8월 한 달은 열대야에 시달리겠구나 했는데, 어느새 고개 돌려보니 입추가 지났고 말복이 되었다. 이때쯤 삼계탕이나 해 먹어야겠다 싶었는데 딱 맞게 닭곰탕을 해 먹었으니 몸이 제 알아서 한 샘이 되었다.
24 절기는 어쩜 그리 잘 맞는지 아침과 밤에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땀에 젖은 내 등을 시원하게 훑어주고 갔다.
무더위보다 더 무서운 건 높은 습도다. 조용하게 늙어가다가도 덥고 습한 여름을 견디고 나면 폭싹 늙고 더 시들어있음이 확연히 보인다. 겉은 그렇게 늙어가고 그러면 속은 어떨까?
헤아릴 수 없는 시아버지의 침묵, 시끌벅적하게 스트레스를 푸는 아들, 멋쩍어서 수다스러운 딸, 갈수록 예민해져 뻣뻣한 얼굴의 나와 남편의 사방팔방 시끄러운 휴대폰 소음까지, 나의 일상은 끈끈함과 여기저기 끊어진 어설픈 거미줄처럼 성긴 가족애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중이다.
일 년째 취준생인 딸과 밤새 삼만보를 걸으며 일하는 아들이 내 곁에 머물러 있다. 자식이 놀아도, 일해도 근심인 건 매한가지다. 원하는 바가 있지만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우리네 삶. 덕담인지, 충고인지, 잔소리인지 모를 덜 다듬어진 말들이 내 입에서 하루 종일 맴돈다. 툭 내뱉고 나면 닿을 곳 몰라 허공에서 맴돌 것을 알기에 그저 꾹 다물고 있다.
뭔가 할 말이 많은 시아버지의 표정과 내 마음이 겹친다. 부모의 말과 자식의 말을 다 쏟아내 모아놓으면 부모와 자식의 말 중에 누구의 말이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할까?
부모의 말이라고 해서 다 맞는 말이 아님을 요즘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다. 말도 세월에 따라 변할 건 변해야 자식들도 알아듣는다. 어린 자식의 말이라도 새겨들어야 할 것들이 있다.
모든 말들을 한 꺼풀 벗겨 뒤집어 보면 결국은 네가 잘못될까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건강을 잃을까 봐, 잘못된 길로 빠질까 봐, 시간을 허비할까 봐, 풀어보면 다 그런 것이다. 다 너 잘되라는 말인데도 상대방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마음, 너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짐짓 그런 뉘앙스가 풍긴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외로운 우리는 끈끈한 혈육 관계로 이어져있지만 각자의 삶이 있기에 다른 이의 간섭도 필요 없고 내가 간섭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들 보는 모습과 자식이 부모를 보는 모습은 어느 정도 마땅찮아 보이는 행동들이 다분히 있어 서로 할 말이 입 언저리에 가득하지만 애써 참는다. 모든 말과 대화는 적당한 때가 있다. 부모 자식 간이라도 눈치 없이 퍼붓다가는 씨알도 안 먹힐 때가 무척 많다. 부모의 산 세월은 무시할 수 없고 다 큰 자식은 더 이상 부모 맘대로 할 수 없다. 자식을 손님 대하듯 하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생각도 마음도 공허해지는 속을 무슨 말로 어떻게 채워야 온전히 받아들일까?
난 좋은 사람에 대한 로망이 있다. 말없이 옆에 있어도 좋은 사람, 생각나는 사람, 그런 좋은 친구, 좋은 자식, 좋은 며느리, 좋은 아내. "그 사람 좋더라" "사람 괜찮아" 그런 유의 말을 듣고 싶어 한다. 좋은 사람에 대한 기준은 내가 세운 기준이 아닌 남 보기에 그럴듯한,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내가 최고라는 말을 듣기 위한 기준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꿈꾸는 아주 일반적인, 남이 부러워할 만한 획일적인 기준들이 내 안에 가득하다. 그런 것들은 언제 어디서부터 싹튼 것일까? 살면서 맺은 인간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기준일 것이다. 그런 것들에 무조건 복종하고 맞추면서 살아간 탓에 당연지사가 되었을 것이다. 아닌 건 아니라고, 내 기준은 그게 아니라고 왜 더 빨리 알아채지 못했을까?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 기준에 다다를 거라고 오만을 떨었기 때문일까? 왜 내 나름에 만족하지 못했을까?
인간이 느끼는, 아니 내가 느끼는 만족도는 아마 끝이 없었을 것이다.
왜 지금까지 남의 눈을 그렇게 의식하면서 살았을까? 그냥 내 삶 속에 내 갈 길 가면 되는데.. 답은 그건데. 내가 세운 기준이 아닌 남이 세운 기준에 맞추려다 보니 거기서부터 흔들렸던 것이다.
소유욕일 것이다. 내 것이라는, 나로부터 태어났고 나의 손에 길들여진 것이니 내 맘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욕심.
그러면 나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할까?
매사 초연한 사람처럼 살기란 무척 힘들다. 누가 그렇다더라에 금방 비교하고 의기소침해진다. 현자들이 말한 행복의 기준까지 떠올리며 나를 위로한다. 늘 그렇게 무한반복하며 나를 다스리다 보면 나라는 사람에 대해 실망스러울 때가 있다. 부모, 자식, 아내의 수많은 수식어들이 나를 옭아맨다.
이젠 그런 기준에서 벗어나련다. 나의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늙어가고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모든 생명들은 그 나름의 속도가 있고 가치를 가지고 있다. 억지로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내 욕심이다.
마음은 벌써 가을이다. 너무 더워 여름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수도 없이 생각했었는데..
여름의 들녘, 소낙비에 무성하게 자란 초록색 풀들의 싱싱함, 여름의 꽃들, 여름이 선사하는 것들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 이 또한 아쉬웠다. 제비꽃은 제비꽃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나는 나대로,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늙어가면 늙어가는 대로, 본연의 모습 그대로 꽃 피우고 자라야 완전해지는 섭리를 바람에 따라 이는 물결을 보며 내 마음에 새겼다.
법정스님 '서 있는 사람들' 中에서 발췌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 그만이지, 제비꽃이 핌으로써 봄의 들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그건 제비꽃으로선 알 바가 아니라네."
모든 꽃들이 그 꽃들답게 피어날 때 그 꽃밭은 비로소 장엄한 교향약의 조화를
이룰 것이다. 사계절을 두고 생명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