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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부엌

▶ 버리는 게 언제쯤 쉬워질까?

by 달자

친정 가는 길이 후끈후끈하다. 뜨거운 열기가 친정을 간다는 설렘을 반감시켰다. 챙 넓은 모자에 양산까지 쓰고 걷는데도 온몸에 땀이 솟았다. 울 엄마가 이렇게 더운 여름에 태어나 외할머니는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셨을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스쳤다.


오늘은 엄마의 생신이다.

이 더운 여름날, 불안한 시기에 세상에 나온 엄마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고생하며 사신 탓일까,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원인 모를 병으로 고생하시던 엄마가 어느덧 84세가 되었다. 벌써 몇 년 전부터 이러다 죽지, 입에 달고 사셨던 때가 수년도 지났다. 살림밑천이며 하나뿐인 딸의 도움이 무색하게 잔소리를 회초리처럼 퍼붓던 엄마였는데 아픈 엄마를 보면 볼수록 그동안 내가 알고 살았던 엄마는 엄마의 본모습이 아니었나 싶게 나에게 무척 다정하시다.



친정집 아파트는 거의 37년이 되어간다. 겉은 멀쩡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낡음 그 자체다. 그동안 부엌과 욕실을 한 번 고쳤을 뿐 다른 곳은 그대로이다. 창문 틀도 휘어져 닫히지 않고 천장도 내려앉았다.

엄마의 꿈은 새집으로 이사 가는 것이다. 처음 장만한 집에서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얼마나 지겨우실까? 결혼하고 15번 이상 이사 다닌 나는 2년만 지나도 슬슬 이사 갈 시기라는 걸 몸이 벌써 알아챈다.

새로운 곳, 새로운 환경,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에 대한 로망이 있다. 열심히 정리하고 청소해도 쌓이는 먼지의 공격은 새로움의 갈망을 부추긴다. 언제쯤 엄마의 로망이 이뤄질까? 까마득하다.


양복 만드는 일을 하시는 아버지는 아직도 일을 하신다. 관절염과 노안으로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 바느질이 60년 이상 해 온 일이기에 손이 알아서 일을 한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일을 해야 제대로 하실 수 있다. 만약 집이나 다른 장소에서 누군가 바짓단을 고쳐달라거나 허리를 줄여달라고 하면 그다음 날 다 터진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버지는 직장에서는 기술자, 집에 있을 땐 영락없이 힘없는 노인이다.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없는 힘까지 쥐어짜가며 직장을 다니신다. 아픈 아내를 위해, 지겹고 지루한 노년을 견디기 위해 한 땀 한 땀 바느질에 에너지를 쏟아내시는 것이다.

초췌한 모습으로 현관을 들어서는 아버지의 불그스름한 얼굴, 아침보다 더 처진 어깨가 날 울컥하게 만들었다. 딸을 위해 비싼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온 아버지를 보자마자 아이스크림 잔뜩인데 뭐 하러 또 사 오느냐고 타박하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그냥 가끔은 좀 넘어가면 안 되는 걸까? 껄껄 웃다가도 갑자기 버럭 화내는 엄마의 변덕을 아버지와 우리 남매는 숱하게 보며 살아왔다.




엄마의 부엌,

엄마의 손이 편하게 이것저것 남동생이 설치해 놓은 것들과 엄마의 습관인 일회용 그릇을 차곡차곡 모아놓은 찬장, 언제인지 모를, 잘 걸어 다니셨던 날에 엄마가 분명히 샀을 사기그릇세트가 꼭대기 모서리에 딱 들어맞게 앉아있다. 난 그것을 죄다 꺼내보았다. 회색빛 먼지들, 포장박스는 삭아서 푸석거렸다. 방금 샀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사기 그릇은 윤기가 돌았다. 이 그릇에 무언가 담길 날이 올까?

앞으로 절대 쓸 일 없어 버릴 것과 쓸 것, 예뻐서 도저히 버리지 못할 것들을 나눠가며 정리를 했다.

내가 가져가도 엄마는 눈치 못 챌 것들이 수두룩하다. 잊지 못해 떠올리는 과거처럼 차곡차곡 쌓인 엄마의 손때 묻은 물건들, 참으로 역사적인 물건들이다. 처음에는 깨끗한 찬장, 투명한 유리그릇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먼지 낀 찬장, 누렇게 변색된 유리그릇이 되었다.




남이 해준 밥이 맛있는 것처럼 엄마는 내가 해준 밥을 맛있게 드셨다. 콩나물 대가리 하나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다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엄마는 늘 버리지 못해 매 끼 맛없는 식사를 하신다. 그러니 입맛이 있을 리가.

딸이 부엌에서 왔다 갔다 하니 불편한건지, 불안한건지 모를 표정으로 갸웃거리신다. 좀 편하게 계시지. 옛날의 쩌렁쩌렁한 엄마는 어디 가고 시들은 꽃송이처럼 약하고 조그마한 아이 같은 노인이 보인다. 내 미래의 모습일지 모를 구부정한 모습.



엄마를 보니 행복은 별게 아니다. 내 팔다리로 밥 해 먹고 걸을 수 있는 게 가장 큰 행복이다.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 버릴 것들은 시원하게 버리고, 미친 속도 탈탈 털어내고, 살아있으니 살 생각만 하길 바란다.

살고 싶다가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들고, 죽고 싶다가도 살아지는 게 인생이다. 죽는 날은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를 죽음을 백 날 생각해 봐야 시간만 아깝다.


고층 베란다에서 내려다본 저 끝에서, 아직 죽음은 멀었으니 아래는 보지 말고 하늘을 보라고 한다.

그래, 그냥 살자, 엄마.. 살아가자. 살다 보면 살아져. 더 이상 아프지 말구.



©Dal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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