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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회(所懷)

▶ 추석이 지나갔다.

by 달자

추석연휴 내내 비가 내렸다.

형님네로 향하는 길은 사람은 없고 고요하기만 한 미지의 세계를 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멀리 보이는 63빌딩은 먹빛 안개의 소용돌이에 가려져 더욱 몽환적으로 보였다. 안개 낀 도로를 지나 축축한 기운의 도시로 들어서니 비 맞은 낙엽들이 가을의 스산한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반갑기도 하면서 무겁기도 한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명절 때만 보는 친척들의 얼굴은 주름살이 더 깊이 파였고 삶의 지혜를 터득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늘 그렇듯 앙금이 있는 만남이었지만 서로 애써 웃으며 데면데면하게 인사를 나눴다.


시엄니가 살아계실 적,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준비했던 상차림은 옛날의 기억으로 사라졌고 음식은 대화의 윤활유이므로 간소하고 적당하게 차렸다.


갈등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속 깊은 얘기는 행여 마음 상할까 선뜻 누가 먼저 꺼낼 용기는 내지 못했다. 오히려 더 깊숙이 눌렀다. 그저 소소한 일상과 이내 사라질 얘기들로 그 자리를 지켜냈다.

끊김 없는 스몰토크로 거슬리는 말다툼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이런 만남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유교사상이 전부였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형제지간이라도 서로 안 맞는 교류를 굳이 할 필요도 없거니와 쓸데없는 얘기로 서로 할퀴는 감정싸움은 피하고 각자 건강한 삶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도 나쁠 건 없다.

서로 건강하자 다짐하며 헤어진 만남이 비록 가식이 섞여있을지라도 뒤끝은 없다. 그거면 됐지 뭐.


훗날 얼굴 붉히는 일이 생기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서로 잘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거의 똑같거나 비슷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형제자매라는 걸 생각한다면 싸울 일이 뭐가 있겠냐고 하겠지만 마음이 안 맞으면 이웃보다 못한 관계가 되고 친구보다 더 안 만나지는 사이가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집에 가는 동안 이런 잡다한 생각들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다음 날, 늘 그리운 친정으로 향했다.

© DalJa


비 온 뒤 하늘은 청명하고 공기는 더더욱 상쾌했다. 며칠 비가 온 하늘은 먹구름의 잔재가 남아 음침했지만 다음 날 오후에는 눈부신 햇살이 베란다 창으로 가득 들어왔다.


나는 남동생과 얼른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갔다. 물기를 머금은 생생한 나뭇잎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친정 가는 길에 촘촘하게 서로 붙들고 바들바들 떨고 있던 자잘한 나뭇잎무리가 아직 여름인가 싶게 건강해 보였었는데 오늘은 금세 잘 말라 있다. 거리에는 축 쳐져있던 갈색 나뭇잎들이 돌돌 말려 거리를 뒤덮었다. 밟을 때마다 들리는 바삭한 나뭇잎 소리와 가을의 냄새가 나를 기분 좋게 해 주었다.


© DalJa


키 큰 나무들을 따라 고개를 들어 시선을 쭈욱 올리니 하늘을 뚫을듯한 그 기세에 마음이 웅장해졌다. 마치 날 내려다보듯 거인처럼 서 있다. 햇살을 받아 나뭇잎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하늘을 뚫고 곧게 뻗은 나무의 꼭대기를 바라보노라니 판다처럼 기어올라가 나뭇가지에 앉아보고 싶어진다.

하늘과 가까운 저 위의 바람은 속세의 번잡스러움을 다 날려줄 것만 같다.


나무가

"저 높은 곳의 태양은 네 눈에 둥그렇게 다 들어오지만 모든 이들이 골고루 누리는 햇살이니 네 인생만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마"

"눈이 부시면 눈을 감고 그냥 느껴봐. 눈을 감아도 햇살은 느껴질 테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커다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오늘따라 대단해 보인다. 이들이 삶을 지탱하는 방법은 뭘까? 햇살과 수분과 양분만 있으면 살아남는 걸까? 인간들이 한번 짓밟고 휘저으면 쓰러지고 망가지는 힘없는 생명체들임에도 이렇게 순리를 지키고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자연의 선물이 한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인간들의 막힌 숨을 뚫어주고 눈동자에 아름다움을 채워주고 그들의 땅을 밟게 해주는 포용심에 좁아터진 나의 마음그릇이 그동안 섭섭하고 미웠던 사람들을 다 받아들일 것처럼 시원하게 뚫리며 마음이 환해졌다.



남동생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그동안 참 힘들게 잘 버티며 살아왔구나, 새삼 느꼈다. 나의 몫으로 배당된 삶을 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삶의 고통은 동반자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아직 혼자인 남동생은 힘든 노동과 숱한 유혹, 잡념을 운동으로 이겨냈다. 또한 노부모님을 잘 부양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나랑 한 살 차이의 친구 같은 동생이 너무 고마워서 엄지척을 해줬다.




이성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 낳고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도 삶의 일부분이고 돈을 벌기 위해 피땀 흘리며 살아가는 것도 삶의 일부분이다. 내가 지금 안고 있는 고통이 최고이고 너무 견디기 힘들어 누군가 나의 고통을 좀 알아주기를, 내가 이만큼 힘드니 날 좀 건드리지 말라고 세상에 고함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고통을 견디고 이겨낸 경험들은 나만의 방법이고 지혜이다.

하지만 내 방법이 최고라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자식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어른들의 말은 따지고 보면 대부분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거부감이 드는 걸까?

그 사람은 상대방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헤아리지 않았을뿐더러 알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이겨냈는데 넌 왜 그게 안되느냐고 아무리 우겨봤자 듣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우선이다. 그래야 서로 진심이 통한다. 그래야 그 사람의 경험이든 충고든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제일 가까우면서 먼 관계, 너무 잘 알아서 모르는 척하는 관계, 그런 마음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누군가의 목소리는 커지고 누군가의 목소리는 작아진다. 가까울수록 잘 들어줘야 한다. 일방적인 충고는 거북스럽다.

상대방의 깊은 뜻을 잘 헤아려 거짓은 버리고 진심만 헤아리고 살면 인간관계의 반은 성공이다. 거짓만 보일 때, 단점만 보일 때 그 사람이 싫어진다. 삶의 고통을 관통한 그 사람의 내면이 느껴지지만 왠지 가벼워 보인다.


말속의 숨은 뜻을 자꾸 생각할수록 그 사람의 속내가 보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왜곡되어 변질될 수 있다. 올해 추석의 만남은 그렇게 설레기도 했고 부담되기도 했다. 만남 후에는 내가 혹시 이상한 말은 하지 않았나 짚어본다. 괜찮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이미 흘린 말이니 주워 담을 수 없다.

고로,

듣는 귀를 잘 관리하고 말조심과 침묵을 늘 상기하여 나로 인해 누구도 상처받지 않기를 저 멀리 달님에게 기도했다.

어쨌든 나의 가족과 친척들은 삶의 고단함을 이겨낸 사람들이며 현재 이겨내고 있는 대단한 사람들이다.


© DalJa (보름달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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