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百의 그림자 /황정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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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그림자를 보았다.
처음엔 그림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덤불을 벌리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저쪽도 길인가 싶고 뒷모습이 낯익기도 해서 따라 들어갔다. 들어갈수록 숲은 깊어지는데 자꾸 들어갈수록 뒷모습에 이끌려서 자꾸자꾸 들어갔다.
은교 씨.
어디 가요. 하고 그(무재)가 물었다.
그냥 가는데요.
어디를요.
따라가고 있었거든요.
누구를요.
저 사람을, 하면서 앞을 보니 그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무재씨가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었다.
머리가 작았고 어깨가 좁았고 가무잡잡했다고 말했다.
은교 씨처럼?
네.
나처럼, 하고 대답한 순간 어, 싶었다. 오른쪽 새끼발가락 쪽에서 가늘고 가늘게 늘어난 그림자가 덤불을 넘어 어디론가 뻗어 있었다.
그림자로구나.
그때 알았다.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무재 씨의 모습이 어쩐지 부옇다고 생각해서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니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여우비가 내리고 있었다.
돌아갈까요?
눈썹에 고였다가 눈으로 흘려드는 빗물을 훔치느라고 눈을 비볐다.
울어요?
울지 않는데요.
계속 걸을까요?
일단 걸어 봅시다.
다리가 쓰라려서 내려다보니 풀에 베인 상처투성이였다.
무재 씨, 춥네요.
가만히 서 있어서 그래요.
죽겠다.
죽겠다니요.
그냥 죽겠다고요.
입버릇인가요.
죽을 것 같으니까요.
그러면 죽을까요?
여기서,라고 너무도 고요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겁을 먹었다.
은교 씨,
정말로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무렇게나 죽겠다고 말하지는 마요.
네.
... 내 그림자도 그토록 위협적인 것일까요?
글쎄요,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무재 씨, 죽는 걸까요, 간단하게.
따라가지 마요.
그림자가 일어서더라도, 따라가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는 거예요.◿
소설은 등장인물의 일터인 전자상가의 철거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그려진다. 주인공들은 따옴표 없이 짧고 덤덤하게 대화하지만 여백과 행간에는 어딘가 긁힌 것 같은 상처가 뭉근하게 느껴져 계속 신경 쓰인다. 읽다 보면 그들의 수동적이고 축 처지는 분위기에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 싶다가도 아주 미세하게 희망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대화체가 어쩐지 낯설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다. 툭 치면 깨질 것 같은 가냘픈 은교와 무재의 무해하고 순수한 사랑이 영원히 깨지지 않도록 보호해주고 싶다.
누구나 (제목의 百이 의미하는 것이라 짐작해 봤다)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고통으로 인한 절망으로 비유(이것도 짐작이다)하며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 속에 주인공처럼 출현한다.
그들에게는 어떤 절망의 그림자가 쫓아다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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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서운 거지, 그림자가 당기는 대로 맥없이 따라가다 보면 왠지 홀가분하고, 맹하니 좋거든, 좋아서 자꾸 따라가다가 당하는 거야, 사람이 자꾸 맥을 놓고 있다 보면 맹추가 되니까, 가장 맹추일 때를 노려 덮치는 거야.
여 씨 아저씨가 말을 이었다.
요즘도 이따금 일어서곤 하는데, 나는 그림자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니까 견딜 만해서 말이야. 그게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고 말이지. 그림자라는 건 일어서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그렇잖아? 물론 조금 아슬아슬하기는 하지.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게 되어버리면 그때는 끝장이랄까, 끝 간 데 없이 끌려가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은교는 동급생의 따돌림으로 열일곱에 학교를 떠났다. 엄마는 일찍 집을 나갔고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다. 그런 아버지가 전자상가에서 음향기기를 수리하는 여 씨 아저씨의 일을 돕도록 주선해 주었다.
무재는 전자상가에서 트랜스 만드는 공방의 견습공이다. 무재의 아버지는 빚을 지고 돌아가셨다. 무재는 그 빚을 갚으면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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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을 갚기 위해 빚을 지고, 빚의 이자를 갚기 위해 또 다른 빚을 지고, 전심전력으로, 그 틈에 점점 불어나는 먹고사는 비용의 빚을 져 가는 일의 연속...◿
전가상가건물은 가나다라마동의 다섯 개 건물이었으나 사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여기저기 개축되어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 건물 중 나동 전자상가에서 둘은 만났다.
오래된 전자상가 건물이 철거된다는 이야기가 떠돌더니 급기야 가동은 먼지하나 날리지 않고 조용하게 철거되어 넓은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철거된 가동에 오무사가 있었다.
오무사는 얼핏 지나가면서 우연히 볼 수 있는 곳이 아니고 그런 가게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갈 수 있는 가동의 북쪽 모서리에 있다. 건물과 건물사이 틈의 통로로 들어서면 1970대에 세워진 모습 그대로인 가게와 머리칼이 모두 하얗게 세어 버린 70대 노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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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벽돌만 한 골판지 상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선반을 등진 채로 나무 책상과 걸상을 놓아두고 앉아 있었다. 침침하게 머리 위를 밝히고 있는 알전구 불빛 속에서 그는 언제나 무언가를 들여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손님이 찾아와서 어떤 종류의 전구를 달라고 말하면 대답도 없이 서서히 걸상을 밀며 일어났다. 서두르는 법 없이 그렇다고 망설이는 법도 없이 선반의 한 지점으로 부들거리며 다가가서, 어느 것 하나 새것이 아닌 골판지나 마분지 상자들 틈에서 벽돌을 뽑아내듯 천천히 상자 하나를 뽑아내고 그것을 책상으로 가져와서 일단 내려 둔 뒤엔 너덜너덜한 뚜껑을 젖혀 두고, 이번엔 다른 선반으로 걸어가서 손바닥만 한 비닐 봉투 한 장을 가지고 책상으로 돌아온 뒤, 시간을 들여 정성껏 봉투를 벌려서 입구를 동그랗게 만들어 둔 다음에, 오른손을 상자에 넣어서 손톱만 한 전구를 한 움큼 쥐고 나서, 왼손에 들린 채로 대기하고 있는 봉투 속으로 한 번에 한 개씩, 언젠가 내가 다른 손님들 틈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가 재미있게 얻어들은 바에 의하면, 제비 새끼 주둥이에 뻥 과자 주듯, 떨어뜨렸다.
바쁜 일로 서두르며 오무사까지 걸어왔어도 그거 주세요, 하고 난 뒤로는 오로지 그의 패턴으로만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오무사를 방문한 손님들은 입구에서 넋을 놓고 선채로 가게 안을 들여다보거나, 근처 구멍가게에서 삶은 계란을 까먹으며 기다렸다가 전구를 받아 가곤 했다. 노인은 느릿해도 대단히 집중해서 움직였으며 그 움직임에 기품마저 배어 있어서, 손님의 처지에선 재촉할 틈이 없었다.
대단히 성급한 사람 중에 몇 마디 투덜거리는 경우는 있어도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경우는 없었다. 오무사의 상자들이 워낙 오래전부터 쌓여 왔던 것들이라 어디서도 구해볼 수 없는 전구를 거기서는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잘 보면 볼펜으로 조그만 표시가 된 상자들도 있었지만 표시조차 없는 상자들이 더 많아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곳의 주인뿐이었고, 사실 오무사의 노인은 어떤 전구를 달라고 해도 헤매는 법 없이 곧장, 느릿느릿하기는 해도, 그 전구가 담긴 상자가 있는 선반을 향해 걸어갔다.
할아버지가 죽고 나면 전구는 다 어떻게 되나. 그가 없으면 도대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까.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모두 버리지는 않을까. 오무사에 다녀오고 나면 이런 생각들로 나는 막막해지곤 했는데, 수리실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엔 수리실과 여 씨 아저씨를 두고 이것과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서 나(은교)는 그때마다 수리실의 내력을 생각해 보고는 했다.◿
오무사 할아버지는 조그만 전구를 다발로 사가는 손님에게 덤으로 한 개를 꼭 더 넣었다. 가다가 깨질 수도 있고 또는 불량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했던 오무사는 철거와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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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사는 것이 그렇다고(공허함) 나(무재)는 생각해 왔거든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그림자들을 목격하면서, 그런 생각을 조금씩 삼켜 왔다고나 할까, 점차로 물이 들었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도 있는 거예요.
우리가 사는 뒤쪽엔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박스를 줍는 할머니가 혼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다른 동네에서 거기까지 박스를 주우러 온 할아버지를 맞닥뜨려서, 다툼이 일어난 거예요. 두 노인이 서로 격렬하게 저주하며 상대방의 손수레에서 넝마를 끄집어내 던지다가 할아버지는 가고 할머니가 남았거든요. 할머니가 분하고 원통하다고 가슴을 두드리며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나는 보았거든요. 그녀의 그림자가 엄청나게 부풀어 오른 머리를 그녀 쪽으로 기울이는 것을 나는 보았거든요. 이날 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거였어요. 그녀가 결국 그림자를 견디지 못해서 죽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자식들이 찾아와서 장례를 치르고 난 뒤로도 그녀의 손수레는 며칠이고 모퉁이에 남아 있었어요. 실린 것도 몇 가지 없이 박스 몇 개 하고 스티로폼 조각하고 비닐 같은 것들이었는데 나는 그 앞에서 그것들을 들여다보면서 이런 것들 때문에 죽는구나, 사람이 이런 것을 남기고 죽는구나, 생각하고 있다가 조그만 무언가에 옆구리를 베어 먹힌 듯한 심정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예요.
은교 씨, 나는 특별히 사후에 또 다른 세계가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는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라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차가운 메밀국수를 준비하는 무재의 곁에는 그림자가 한참 동안 너울거렸다. 엄마와 위로 여섯 누나가 있고 빚보증으로 그림자가 솟구쳐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로 인해 어릴 때부터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무재의 어깨는 그림자에 짓눌리며 살았을 것이다.
허망하게 죽은 박스 줍는 할머니만큼이나 허망한 죽음이 어디 한둘일까?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하지 않으려면 어깨를 짓누르는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은교와 무재의 사랑은 따뜻하고 맑고 개운한 국물처럼 투명하고 가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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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나는 칠갑산 좋아해요.
나는 그건 부를 수 없어요.
칠갑산을 모르나요?
알지만 부를 수 없어요.
왜요.
콩밭, 에서 목이 메어요.
목이 메나요?
콩밭 매는 아낙이 베적삼이 젖도록 울고 있는 데다, 포기마다 눈물을 심으며 밭을 매고 있다고 하고, 새만 우는 산마루에 홀어머니를 두고 시집와 버렸다고 하고...
그렇군요.
말없이 밤거리를 바라보았다. 전조등을 밝힌 차들이 노랗게 빗줄기를 비추며 지나가고 있었다.
등나무 잎을 삶으면, 하고 무재 씨가 문득 말했다.
삶아서 그 물을 마시면 금이 간 부부 사이의 금슬이 다시 좋아진대요.
그렇대요?
언제고 우리 틈에 금이 가면 삶아서 마실까요?
라는 말에 당황해서 우리는 부부도 뭣도 아닌데,라고 얼버무리자 무재 씨가 우산 속에서 싱글벙글 웃었다. 나는 흠, 하고 기침을 했다.
금슬은 잘 모르겠지만 무재 씨, 이렇게 앉아 있으니 배도 따뜻하고, 좋네요.
네.
그냥 좋네요.◿
시원하게 메밀국수 해줬더니 따끈한 게 먹고 싶다고 하는 은교를 위해 3만 원짜리 중고차를 몰고 와 따끈한 국물을 마시러 가자고 하는 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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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었어요?
이번엔 따끈하고, 개운했나요?
네, 맛있었어요, 따끈하고 맑고 개운했어요, 고마워요, 데려와 줘서,라고 말하자 무재 씨가 웃었다.◿
과부하가 걸린 엔진은 수명을 다했고, 막막한 허허벌판의 어둠 속에 그들이 서있다.
◸무재 씨와 손을 잡고 돌아섰다. 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걸었다. 가로등 불빛 속에 덩그러니 차가 남아 있었다. 그림자 하나가 그 곁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거리가 상당한 데다 어둠으로 바닥이 지워져 무재 씨의 것인지 내 것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갸름한 덩어리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처럼 서 있다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움직였다. 불빛의 가장자리에서 어둠으로 들아서고 나서는 몇 차례 흔들리는 것이 보이고 난 뒤로 더는 보이지 않았다.
따라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어둠에 잠겼다가 불빛에 드러났다가 하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은교 씨.
노래할까요.◿
은교가 이야기한 오무사 노인의 사라진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무재가 이야기한 박스 줍는 할머니의 허망한 죽음은 개인적인 사정에 의한 것이 아닌 사회적인 이슈로 발생되는 문제들이다. 이런 거친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은교와 무재의 사랑이 어떤 것들로 인해 깨질까 봐 읽는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완벽한 사랑도 없다. 왠지 무뚝뚝한 은교와 어딘가 허당스런 무재의 애틋한 사랑이 가난으로 인해, 세상의 악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기를, 그림자에 끌려가지 않기를 바란다.
작가의 말
여전히 난폭한 이 세계에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이 아직 몇 있으므로
세계가 그들에게 좀 덜 폭력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이 세계는 진작부터 별로 거칠 것도 없다는 듯 이러고 있어
다만
곁에 있는 것으로 위로가 되길 바란다거나 초자기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
밤길에
간 두 사람이 누군가 만나기를 소망한다.
모두 건강하고 건강하길.
- 2010.6. 황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