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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 어둠의 사육제(한강/1995)

by 달자

영진은 청주에서 한 참 더 들어간 마을에서 농부의 7공주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가난한 살림에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한 영진은 대학진학의 꿈을 갖고 상경하여 조그만 무역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적금을 붓고, 공부도 하며 알뜰하게 살아간다.


그런 희망을 품고 살아가던 어느 날,

같은 고향 사람인 인숙언니를 만난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인숙언니와 그동안 모은 돈을 합쳐 전세방을 구해 같이 살게 된다. 그러나 봉제공장에 다니는 인숙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졌다.


영진이 퇴근하고 돌아온 어느 날,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방은 난장판이었다. 인숙이 전세금을 몽땅 빼돌려 도망간 것이다.


발췌

◸믿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어질러진 장판 바닥에 넋을 잃고 앉아 나는 모든 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인숙언니가 빼간 전세금은 지난 사 년간 내가 키워온 희망이었다. 내 대학이었고, 장래였고, 젊음의 담보였다. 그것은 내 인생의 전부였다.◿



영진은 서울의 아파트에 사는 이모집을 찾아 겨울만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뿌리칠 수 없던 이모는 영진을 받아들였지만 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차라리 베란다에서 자도록 밀어낸다.

차가운 바닥, 어둠만이 감도는 베란다에서 영진은 마치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쓴 사람처럼 행동하며 깊은 어둠의 진득한 고통을 이겨내며 살아간다.



발췌

◸어둠이 베어 먹다 말고 뱉어놓은 살덩어리 같은 달이 떠 있었다. 이지러진 달의 둥근 면은 핏기 없이 누리끼리했고, 베어져 나간 단면에는 검푸른 이빨 자국이 박혀 있었다. 그 깊숙한 혈흔을 타고 번져 나온 어둠의 타액이 주변의 천제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밤하늘은 온몸을 먹빛 피멍으로 물들인 채 낮은 소리로 신음하며 뒤척이고 있었다.

이따금씩 머리를 들어 그 하늘을 치어다보면서, 고꾸라지려는 무릎을 힘주어 가누면서 나는 꼿꼿이 앞을 향해 걸었다. 어둠은 수천수만의 현란한 색채를 띠고 눈앞에서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 어둠들이 창날을 세우고 덤벼드는 족족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파리한 가로등 불빛의 입자들, 차량들의 꽁무니마다 매달려 몸부림치는 붉고 노란 후미등의 불빛들을 나는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인숙언니에게서 배운 오기가 나를 버티어주고 있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하였는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거실과 통하는 미닫이문을 닫고 밤 불빛 앞에 서는 것과 동시에 내가 하루 동안 가장했던 모든 천연스러움과 빈정거림은 흔적 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세상 속에 있을 때 나는 외로웠고 세상에서 돌아와 서면 더욱 그러했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드넓은 서울의 야경 위로는 지난 겨우내 단 하루도 잊어본 적 없는 인숙언니의 얼굴이 겹쳐져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밤 불빛 위로 일렁이는 인숙언니의 얼굴이 그녀 특유의 독기 어린 인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인숙언니는 나의 사 년을 빼앗아간 사람이었다. 나를 배반한 사람이었으며, 이 세상의 끝 같은 베란다로 몰아낸 사람이었다. 짐을 꾸리고 전세방을 나서면서 나는 어떻게든 인숙언니를 찾아 따귀를 올려붙인 뒤 돈을 되찾고 말리라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이제 인숙언니의 갸름한 얼굴은 어둠 속에서 희부옇고 서글픈 물그림자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마음이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말라붙지 않은 먹피가 턱에 엉겨 있던 인숙언니의 눈감은 얼굴은 불빛들 위에서 자꾸만 희어졌고, 야위어만 갔다. 내가 아무리 잠을 청하려 해도 잠을 이룰 수 없게 하는 고통스러운 환영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보낸 사 년 동안 나는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희망의 힘으로 살아왔었다. 비록 지금은 미운 오리새끼처럼 세상의 구석에 틀어박혀 원치 않는 일에 시달리고 있지만, 언젠가 진짜 삶이 시작되고 말 것이라고 주문처럼 믿어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진짜 삶이 과연 한 발 한 발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던 그때 인숙언니는 떠났다. 나는 그녀로 인해 내가 잃은 것이 돈과 신뢰만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나는 삶과 화해하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삶이 나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잘 벼린 오기하나만을 단도처럼 가슴에 보듬은 채, 되려 제 칼날에 속살을 베이며 피 흘리고 있었다.

한데 그 위안의 손짓 같은 찬란한 불빛들을 바라보는 동안, 인숙언니의 야윈 얼굴이 그 야경 위로 하루하루 아련하게 시들어가는 동안, 내 앙가슴에 맺혔던 피멍울도 어느 사이엔가 함께 풀리어갔다. 멍울이 맺혀 있던 그 자리에 모호한 미련들이 뒤이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눈도 없고 코도 없는 그 멍청스러운 미련이란 결국 내가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 아무것도 끝나지도 시작되지도 않았으며,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한다기보다는 지금 이대로의 상태로라도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불분명한 용기였다.◿




맞은편 다른 동, 베란다에서 공부하고 잠을 자는 영진을 눈여겨보는 명환이 있다. 명환은 이 아파트에 사는 젊은 가장의 차에 치여 임신 5개월 차 부인과 자신의 다리 하나를 잃었다. 대기업 이사 조카뻘인 가해자는 많은 돈의 보상금을 주어 사건을 해결했다.

명환은 그 보상금으로 가해자가 사는 아파트로 이사 오고 그들의 집으로 쳐들어가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겁박했다. 가해자는 명환에게 무릎 꿇고 사죄했지만 며칠 후, 어쩔 수없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간다. 명환은 두 아이의 눈물을 보았다.



발췌

◸사내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보게 되자 사내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성냥불을 당겼을 때 피어오르는 황 냄새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한 번 들이켜면 폐 속에서 평생토록 분해되지 않는다는, 불가항력적인 파멸의 냄새였다.◿



어둠 속에서 영진을 눈여겨본 후, 명환은 퇴근하는 영진에게 집이 필요하지 않느냐며 자신의 집을 가지라고 말한다. 영진에게 있어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았지만 마음 깊숙이 달콤한 제안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명환은 영진의 알 수 없는 표정에서 결국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확신한다. 그러면서 명환의 얼굴은 희미하게나마 밝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영진은 명환의 제안을 거절해야만 했다.


명환은 이 아파트가 아내와 아이의 몸값으로 사들인 집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며 고통받고 있었다. 이 곳은 어디에도 발산할 수 없는 명환의 원통함과 고통의 산물이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는 장소였다.

편안한 아파트에서 사는 게 소원이었던 아내는 옆에 없고 넓은 방에 혼자 죽은듯이 살아가는 자신이 얼마나 싫었을까? 가해자에게 화풀이를 해도 소용없었다. 가해자는 너무나 평범하고 악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밤마다 어둠 속에서 의식처럼 자학행위를 하며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둠과 고통 속에서 뒹굴었던 장소를 홀가분하게 벗어나기 위해 영진을 택한 것이었다.

영진은 그런 그의 마음을 받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설득하려 했으나 그는 완강했고 불가능해 보였다. 이미 그의 영혼은 죽고 육신만 남은 상태였다.



발췌

◸시간은 더디 흘렀다. 동녘 하늘에서부터 새벽이 희부윰하게 동터오기만을 기다리며 나는 명환을 생각하고 있었다. 저 넓은 방에서, 가구 하나 들여놓지 않은 채, 불도 한 번 켜지 않은 채 뒹굴며 살아왔던 명환을 생각했다. 명환의 방에서부터 헤엄쳐 온 어둠은 술렁거리며 내 베란다 문을 두들겨댔다. 어둠은 항암제 부작용으로 뽑혀나간 인숙언니의 치렁치렁한 머리채 같았으며, 뱃속에 명환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는 얼굴 모를 여인의 하혈(下血) 같았다.

어깨를 웅크리고 앉아있던 나는 깨달았다.

그는 죽으려 하는 것이다.

집이 자신에게 필요 없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의 제의를 거절해 온 바로 그 기간만큼 그의 죽음은 연기되어 온 것이었다.

그때였다. 맞은편의 어둠 속에서 상처 입은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낮고 고통스러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길고 습기 찬 침묵을 거느린 채, 그 음산한 절규는 검은 빗발 속을 헤엄쳐 와서 내 어두운 베란다를 울렸다. 고함 소리가 나오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내 입술을 떨게 했다. 두 번, 세 번, 고요한 아파트 단지에 울려 퍼지던 울부짖음은 흐느끼듯이 잦아들어갔다.

내가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때였다. 명환에게서 하루빨리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어둠이 시시각각 점령해 들어오고 있는 베란다 방을 즉시 떠나야만 했다.


베란다의 창살 앞에 곧 허물어질 것만 같은 몸뚱이를 기대어 서면, 저 불빛들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생각할 것을, 무엇인가를 꿈꿀 것을, 무엇인가의 밑바닥을 들여다볼 것을 나에게 강요하곤 했다.

무엇을 꿈꾸란 말인가. 인숙언니는 죽을 것이다.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찬란한 서울의 귀퉁이에서 차갑게 병들어갈 것이다. 무엇을 들여다보란 말인가.

내가 불빛들에게서 고개를 돌리려 할 때마다 그것들은 시위하는 듯이, 입을 모아 야유 하는 듯이 우울한 어둠 속에서 저마다 고함지르며 손뼉을 쳐대고 있었다.

이제 그것들은 나에게 위안이 아니었다. 절망보다도 넌덜머리 나는 미련이었다. 아무런 가능성도 없이 그저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그 가슴마다 무작정 들러붙어 꿈틀거리는 미련, 흡사 피를 빨아먹는 환형동물 같은 그것을 어떻게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변두리의 값싼 월세방을 마련하고 이사하는 마지막 날, 영진은 명환이 아파트에서 투신했음을 알게 된다.




어둠의 사육제는 한강의 소설집 '여수의 사랑' 속 세 번째 이야기다. 한강 작가가 20대에 쓴 여섯 편의 오래된 단편소설들이 마치 현실 속의 내 주변인들 이야기인양 나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현재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우리네 이야기들이다. 작가는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표현으로 자주 등장하는 진눈깨비, 어둠, 달을 통해 아주 무섭도록 현실적으로 표현했다. 한 번 읽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묘사로 인해 여러 번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한강작가의 언어는 장면마다 상처를 쑤시고 헤집어놓는 처절한 표현력이 있다.


영진과 명환의 고통을 굳이 비교하자면 명환의 사연이 더 고통스러울 듯하다. 명환은 이 끔찍한 집을 괜찮은 아파트라는 허울을 씌워 영진에게 주려 했다. 자신의 고통을 인심 쓰듯 영진에게 넘기고 홀가분하게 빈손으로 죽으려 했다. 거부하는 영진에게 자신의 살을 담뱃불로 지지는 자학까지 보여주면서 말이다.

어쩌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명환은 보상금으로 산 고통스러운 아파트였지만 가난하고 자기 방도 없는 영진이 받아주어 넓고 평온한 아파트로 치환되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진은 명환이 삶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랐다.


결국, 명환은 체념하고 영진의 베란다에서 자신의 방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마지막 부탁을 한다. 고요하기만 한 자신의 방을 본 명환은 아픔과 고통은 자신만의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영진의 삶은 여전히 비참하다. 양손에 달랑 몇 개의 짐이 전부이고 어둠은 또 찾아올 것이다. 배반당하고도 아픈 인숙언니를 측은해했듯이, 이모의 박대에도 꿋꿋하게 버텨냈듯이 영진은 그렇게 또 삶을 이어갈 것이다.



⁕작가의 말

이 소설을 쓴 것은 기록적으로 무더웠던 1994년 여름이었는데, 석 달 가까이 명환을 죽이지 않아보려고 소설을 붙들고 있었다. 마지막 밤의 영진처럼 때로 몸이 떨리고 뜨거운 눈물이 솟았던 캄캄한 시간들이 아직 원체험처럼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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