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시작 (산책)
몸살을 앓았다. 감기를 달고 들어온 누군가가 범인이다. 돌아가면서 앓다 나에게 마지막으로 안착했다. 중병은 걸려도 감기는 안 걸리는 내가 감기에 걸리다니. 이건 감기가 아니고 대상포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삼 일정도 침대와 한 몸이 된 후 난 가뿐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환절기 탓으로 돌리고 그동안 못했던 집안일을 한 후 밖으로 나왔다. 폐쇄된 집 공기와는 다른 바깥공기를 훅 들이켜니 살 것 같았다.
우수수 떨어진 낙엽이 그동안 쏟아진 빗줄기에 축 늘어져 있다. 온갖 조그만 생명들이 여기저기서 꾸물거릴 거라 생각하니 호기심 가득한 아이처럼 도대체 뭐가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팔을 흔들고 목을 돌리며 걷다가 뻐근한 허리도 풀어가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늙고 굳어져 가는 뼈마디가 우두득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 소리에 희열을 느끼면서 더욱 과감하게 몸을 비틀었다.
고개를 드니 뭉게뭉게 먹구름이 섞인 그림 같은 구름들이 쏟아질 듯 모여있다. 뭐랑 닮았나, 생각하다 아찔한 현기증이 잠깐 느껴졌다.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귀엽고 작은 꽃들을 몇 분 동안 들여다봤다. 덤불 속 낙엽들과 섞여 어여쁜 색깔을 살포시 드러내고 있는 것들은 나를 미소 짓게 했다.
이렇게 작은 생명들이 누군가에 의해 짓밟히지 않고 제 생명을 다할 때까지 살아있게 해달라고 아주 잠깐 기도했다. 내가 쳐다보고 있다는 걸 얘들도 알까?
나뭇잎 모양이 이렇게 다양한 줄은 미처 몰랐다. 하트, 세모꼴, 둥근 모양, 꽃처럼 핀 나뭇잎까지 실로 다양하다. 인간들만큼이나 여러 가지구나 싶다.
앞서가는 할머니는 허리가 굽어 땅을 보고 가신다. 한 손에는 지팡이, 다른 한 손은 누군가의 손을 잡고 앞을 보다가 땅을 보다가 천천히 걸어가신다. 그 속도를 맞추는 옆 사람은 할머니의 발걸음에 행여 뭐라도 걸릴 게 있나 싶어 아주 조심스럽다. 울 엄마가 생각난다. 수술만 하지 않았더라면 저렇게라도 걸으실 텐데..
좁은 길을 주욱 걷다 보면 듬직한 나무들이 많다. 나무에 매달린 덩굴잎들이 나무를 의지해 띠를 이뤘다. 모든 생명을 다 품어주는 커다란 나무의 품에 안겨 나도 나머지 잠 속으로 빠지고 싶다. 시원한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훑으며 지나간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커다란 나뭇가지가 내게 잘 있었니? 인사하는 것 같다.
그래, 반갑다. 난 한참 동안 바람을 느끼며 활짝 웃었다. 속이 확 트였다.
네 정거장 정도 걸어가면 호수 공원이 나온다. 넓은 호수를 상상하기만 해도 그동안 묵혔던 마음의 찌꺼기가 가시는 듯하다.
호수에서 유유히 떠다니는 오리들, 먹이 사냥에 집중하는 왜가리, 하얀 목과 날개를 출렁이며 하늘을 가르는 백로,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 걸을 때마다 들리는 자연의 소리는 묵직한 마음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이름 모를 새의 실루엣이 꽤 근사하다. 새소리만 요란하고 도대체 새들은 어디에 있나 찾게 되는 일이 많은데 이렇게 내가 사진을 찍을 정도로 오래 앉아있는 새가 있다니 참으로 고마울 지경이다.
사람들은 푸른 창공을 나는 새들이 부럽다고 하지만 새들의 입장에서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거라고 누군가 그랬다. 그렇겠지.
강자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자신을 지켜야 하는 자연의 법칙을 따르며 신이 주신 유일한 필살기, 날개가 있으니 하늘을 날아다니며 놀러 다니는 건 사치일지 모르겠다. 그래도 설마 매 순간 피하고 쫓기지는 않겠지. 새들이 바람을 타고 날갯짓을 하는 것을 보면 여유 부리며 끼를 발산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무슨 생각을 할까? 멈춰있을 때는 뭔가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젖어 있는 백로.
긴 날개를 펄럭이며 창공을 가를 때는 정말 멋있기 그지없다.
하얀 몸, 고고하고 청결하고 아름다울 것만 같은 자태에 비해 백로의 목소리는 좀 괴기스럽다.
밤에 들으면 숲 속 어딘가에서 불쑥 괴물처럼 나타날 것 같은 소리다.
요란한 소리를 찾아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려 해도 백로는 사람들이 절대 다가갈 수 없는 곳을 찾아 무리 지어 다닌다.
가만히 서서 백로의 움직임을 보노라면 나까지 숨을 멈추게 된다.
호수에 붙박이처럼 서서 목표물을 찾으며 잠시 쉬고 있는 듯 보이는 모습을 보노라면 호수에 너울거리는 백로의 그림자는 마치 다른 생명인 것처럼 따로 움직일 것만 같다.
찰랑거리는 호수의 물이 빠진 곳을 보면 바닥의 온갖 찌꺼기들이 보란 듯이 드러난다.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 바람을 타고 날아온 나뭇가지들과 온갖 비닐들. 지저분하고 고여있는 자작한 물 주위를 아기 오리들은 놀이터처럼 유영한다. 오리들은 그것들이 유해한지 알지 못한다. 사람들만이 지저분하다고 얼굴을 찌푸린다. 알면서 버리고 외면하면 그만이다. 아쉬우면 찾아오는 사람들은 호수의 생명들에 눈을 정화하고 머리를 비우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가면 끝이다. 내가 근처에 갈 수만 있다면 호수의 찌꺼기들을 싹싹 거둬내고 싶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길거리의 쓰레기도 그냥 지나치면서 이럴 때만 정의로운 척, 나도 별 수없는 인간이다.
내가 호수의 생명들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아무 계산 없이 잘 지내기를 바라는 것처럼 내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서로 비교하지 않고 진심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안녕하기를 바란다면 이렇듯 세상살이가 어렵지는 않을 텐데. 내가 잘한다고 미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인정은 바라지도 않는다. 갈수록 인색해지는 인간들의 틈바구니 속에 난 자꾸 말이 많아지고 나를 변명하려 든다. 이미 엎질러진 관계를 어떻게 주워 담을까? 난 승자일까? 패자일까? 이도저도 아닌 불쌍한 사람일까?
끈질기게 따라붙는 인간들의 변화무쌍함에 숨이 막힌다.
묵직한 근육통이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다른 길로 가야겠다. 이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을 선택하고 저 길이 아니면 또 다른 길을 선택해야겠지. 어떤 길이든 날 구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길이었으면 좋으련만.
비우려고 나왔는 데 집으로 돌아가려니 내 삶, 내 가족을 살피고 돌봐야 하는 책임감이 마음에 다시 채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여름이 끝나고 새로운 달, 새로운 계절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