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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by 달자

별일이 없는데도 마음이 둥둥 떠있을 때가 있다. 아까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기는 싫어서 뭔가는 해야겠는데, 소설 속 이야기는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어제 읽은 등장인물의 부부싸움의 원인이 뭐였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궁금한데 찾아보기는 귀찮다.


빨래도 개기 싫은 날. 발 밑에 먼지가 날려도 못 본 척, 설거지 후 자작자작한 물기도 닦기 싫고. 그런 날이 있다. 번아웃은 아닌데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북받침이 쑥 올라오는 날.


남편이 잡아온 주꾸미도 손질해야 되고 마트에서 잔뜩 사다 놓은 양식들, 텃밭에서 따온 자잘한 채소들을 깨끗이 씻고 정리해야 되는 일이 가득 쌓여있는데도 막상 하려니 마음이 좀체 움직이지 않는다.

무지막지 쏟아지는 비 한가운데 서서 빗줄기의 강렬한 채찍에 정신 차리고 싶어 질 만큼 마음이 어지럽다.


가을 타나?

누군가 옆에 있다면 어디 벤치에 앉아 듬직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유유히 흐르는 강을 보며 지는 노을을 멍하니 바라보고 싶다.


현실과 떨어져 낭만을 즐기고 싶은, 정작 낭만이 뭔지도 모르면서 낭만타령이나 하고 비가 한 방울이라도 내리면 얼른 집을 향해 뛰어가는, 참으로 현실적인 나를 잘 모르겠어서 아니면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내가 아닌 나로 살고 싶은 충동이 한껏 일었다가 어쩔 수 없어 다시 돌아온다.






©DalJa / A. 푸쉬킨(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852)


나의 학창 시절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일과는 친구에게 편지 쓰는 일이었다. 친구와의 우정이 영원히 변치 않도록 그 마음을 편지에 새기듯 진심을 다한다. 그만큼 편지는 감정에 푹 빠져 썼기에 비현실적인 면이 좀 있다. 멜랑꼴리한 그 감정은 밤새 묵혀있다 사라지고 이어 또 다른 비슷한 감정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편지는 편지지를 고르는 것부터 시작한다. 편지는 그저 편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편지지에 채색을 입히고 예쁜 메모지를 추가로 넣어 마치 내 작품을 보여주고 자랑하듯 만들어낸다.

손과 손으로 전달되는 편지 속에는 어디서 주운 예쁜 돌도 있고 낙엽도 있다. 그런 소품까지 편지에 담아서 친구에게 전달한다.

예쁘게 쓰고 입히고 담는 과정, 왠지 친구가 보고파 쓰는 편지가 아니라 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처럼 난 그렇게 편지를 열심히 썼더랬다.


어떤 말들을 썼을지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편지 말미에 필수로 넣었던 시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였다. 어린 나이의 내가 삶을 얼마나 알았길래 이 시에 꽂혀서 허구한 날 이 시를 읊어댔을까?

아마 그때부터 나의 궁상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내 삶이고 내가 주인인데 나를 속이다니. 시를 시로 보지 않고 굳이 의미를 찾으려는 내 성향은 하나부터 열까지 일초라도 의미가 없으면 허탈함이 오고 의미 없이 보낸 일초가 아까우면서 의미 없는 일들을 계속 멈추지 못하는 나는 삶에 끌려다니는 노예가 아닌가 싶다.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이 시가 나에게 어떻게 도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친구에게 수도 없이 써 가며 보냈던 시구가 결국 나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누가 봤든 어느 누구에게나 박히는 시구이지만 지나고 나면 운명이구나 싶게 나에게도 운명처럼 몇십 년 이상 내 마음에 저장되어 영구삭제도 안 될 만큼 새겨져 있다.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지고'

영원할 것 같은 우정, 사랑은 부르르 거품이 일다가 끝내 사라지는 것처럼 모두 떠나가고 홀로 남았다.

출산의 고통으로 낳은 자식들에게 퍼부었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을 다 거둬들인다면 얼마의 가치로 매길 수 있을까? 돈의 가치로 매기는 것이 속물 같지만 따져볼 것도 없이 허공으로 다 사라졌다.

열심히 살자고 애쓴 보람도 없이 오히려 너무 열심히 살아서 생긴 온갖 질병들 때문에 인생의 수고가 헛고생이 돼버렸다.

참으로 쓰디쓰다. 남김없이 사라진 것들이 자꾸 생각난다. 미련하게.


'지나간 것은 또 그리워지나니'

나의 행복한 시절을 꼽으라면 아이들과 하하 호호 눈 마주치며 안아줬던, 걸을 때 즈음 말랑말랑한 손을 다칠세라 꼭 잡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같이 밥 먹으며 미소 지었던, 햇살 같은 환한 미소가 작은 몸 여기저기 충만하게 머물던 아이들과 함께 부벼대고 살았던 순간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 당시 힘들었던 육아의 고통이 지금은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오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과거를 들여다보면 절실한 마음으로 뭔가에 집중했던 때가 고통으로 남았다기보다 좋은 추억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통과 상실은 노여움의 진액만 남아 내 마음에 끈적끈적 달라붙어 있다.


왜, 그 순간을 즐기며 살지 못했을까? 무의미하게 보내는 일초도 아까워하면서 말이다.

마음에 헛것이 있었나 보다.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인 줄 알면서 깨치지 못한 의식과 무의식의 단절.




©DalJa / 무더웠던 여름의 푸르른 나무들과 하늘



이제 선선한 바람이 내 목을 감싸는 가을이 왔다. 지독하게 더웠던 두어 달의 여름이 지나가니 따가운 한낮의 햇살이 더 이상 밉지 않다. 지나가는 여름을 잘 보내주고 온몸으로 가을을 사랑하리라.


©DalJa


내가 마음을 잡지 못하는 이유는 취준생인 딸과 힘들게 직장 생활하는 아들, 장사를 그만두고 허탈감에 빠져있는 나와 뭔가 생산적인 일을 시작해야 하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남편, 늙었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노쇄하신 아버님, 나의 걱정 일 순위 울 엄마.

뭐 하나 똑 부러지게 결정된 것 없이 지지부진한 지금의 상태가 나를 지치고 허둥거리게 만든다. 어느 때보다 건강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고 열린 마음이어야 하건만 꾹 닫혀있는 내 마음이 답답해서 그럴 것이다.


내가 친구에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진심을 담아 편지에 썼듯이 이제는 나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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