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오전 9시를 기점으로 선선한 공기는 지나갔다. 이제 좀 더워지겠지. 여름과 가을을 느끼게 해주는 9월, 가을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흘렀던 지난 시간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내년에 또 느낄 텐데 영원히 가버린 것처럼 아쉬움이 남는다. 늦도록 태양이 비춰주는 환한 여름, 그 뜨거운 여름을 정말 징하게 싫어했는데 왜 그리워지는지. 그런 애증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길을 걷다가 어느새 드리워진 어두움이 왠지 서글펐다. 이런 별일 아닌 것들이, 아니 대단히도 너무 꿋꿋한 자연의 법칙이 자꾸 마음을 두드린다. 지나간 여름이라기보다 흘러간 시간의 아쉬움일 거다.
뜨거운 가스불 앞에서 무던히도 밥 짓던 내가 잘 견뎠구나 싶어 코끝이 찡했다.
라디오를 켜니 김민기의 '봉우리'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나지막이 읊조리는 듯한 가사와 멜로디.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올라가고 보니 다시 시작하는 봉우리, 그런 봉우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올라간 봉우리가 나의 마지막 정착지이기를 바랐건만 그 봉우리는 그저 스쳐가는 고갯마루라니.
◸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하면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주겠지, 뭐.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 같은 것이 저며 올 때는 그럴 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고.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 지도 몰라.
우리가 땀 흘리며 가는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 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 -김민기 / 봉우리 中-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그런 가사들이 흘러나온다.
봉우리는 이루지 못할, 아니 이뤄 나가야 할 것들이니 마음이 속상할 땐 드넓은 바다를 보라 한다.
바다를 생각하니 답답한 가슴에서 숨이 터져 나온다.
열심히 살았다는 것은 뭘 의미할까? 내 영혼을 갈아 넣어 살았던 지난 삶이 정말 내 온 힘을 다한 게 맞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니었어, 라는 말이 가슴에서 삐져나온다. '더 열심히 살았어야 했어.'
얼마나 더 했어야 할까? 더 했다면 지금보다 나을까?
지금. 여기, 다 했다고,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부터 다시 또 다른 봉우리를 향해 올라야 한다.
숱하게 뇌까리는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라는 말, 그 힘듦의 정체가 뭐였을까? 몸의 고단함, 얽히고설킨 인간관계, 선택의 갈등, 그때는 확실하게 힘든 어떤 것이 존재했었다. 물리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런데,
지금의 힘듦은 나 자체에 있다. 늙어가는 것,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 나와 연결된 타인을 이해하는 것. 정신적인 것을 감내해야 하는 나로 남았다.
자꾸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지금의 나가 아닌 과거의 나를 자꾸 떠올린다. 과거의 나는 이제 없고 사라졌는데도 귀신처럼 내 옆에, 내 정신에 달라붙어있다.
그래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쓰다 보면 남 탓이 내 탓이 되고 나를 일깨운다. 그래서 쓰나 보다.
자신을 제대로 보라고.
나 자신으로 향하는 삶을 살기로 해놓고 그게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 사랑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것도 잘 모르겠다. 사랑? 그게 뭐지? 가족을 위해 밥 짓는 일도 사랑인가? 나를 내 삶으로 옮기고 사랑이라는 테두리로 감싸 안으려니 참으로 힘겹다.
지금을 잘 견디며 살아가는 게 제일 높은 봉우리다. 그 봉우리를 오르고 잘 품고 비워내고 다시 품는 삶으로 가야 한다.
고관절 수술로 힘들어하던 엄마가 조금씩 걷기 시작하신다. 얼마나 다행인지. 지옥 같은 20여 일의 병원생활을 끝내고 집에 오는 날 엄마는 환하게 웃으셨다.
사는 게 힘들어도, 살 맛이 안 나도, 살 의미가 없어도, 그냥 산다.
봉우리를 넘고 또 다른 봉우리를 맞닥뜨리고 또 오르는 그 과정을 견디고 이겨내는 게 살아가는 이유다.
지난 삶이 힘들었다고 추억해도 지금이 가장 힘들다. 금쪽같은 시간이 계속 흘러가고 나에게 있어 그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저축해서 꺼내쓸 수도 없는 시간들을 잘 소비하기 위해 건강한 삶을 위해 움직이고 읽고 쓰는, 가끔씩 하기 싫고 지금은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죽는 날까지 꾸준히 하다 보면 내가 오른 제일 높은 마지막 봉우리에 올랐을 땐 그동안 흘렸던 땀을 정말 시원하게 닦아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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