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중 하나는 거짓말 / 김애란
지우는 지우개를 좋아한다. 싸기도 하고 말랑해서 감촉도 좋거니와 굴리며 갖고 놀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필로 선을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리는 일, 지우는 만화를 그리며 외로움을 달래는 아이다. 지우는 자기만 놔두고 죽은 엄마를 원망하며 살아간다. 투명 인간 취급당하는 학교에서와는 달리 SNS에 단편만화를 올리며 조금씩 유명해지고 있다. 지우는 아무나 죽이고 모두 사라지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한다. 엄마를 힘들게 하고 사라진 아빠를 찾아 못된 마음을 먹기도 한다.
소리는 죽음을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소리는 누군가와 손을 잡았을 때 눈앞이 흐려지면 상대는 곧 죽음을 맞게 된다. 그 사실을 알고부터 소리는 손의 접촉을 피해 뭔가를 쥐고 있어야 했다. 남들은 그런 소리에게 강박과 결벽증이 있다고 수군거린다.
소리는 암투병 중인 엄마 손을 꼭 잡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손을 잡고 엄마 얼굴이 뚜렷이 보여야만 살아갈 수 있는 아이다.
소리는 하루 종일 엄마를 돌보는 일이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가만히 엄마 손을 잡는다. 가끔 엄마 얼굴이 흐려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 마음들이 소리의 가슴 한 구석에 조금씩 쌓여간다.
엄마는 결국 떠난다. 소리는 조금씩 쌓인 못된 마음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그래서 힘들다.
채운은 아빠 때문에 늘 긴장상태다. 실업자가 된 후부터 난폭해졌기 때문이다. 술 먹고 칼을 휘두르며 엄마를 위협하는 아빠를 본다. 그 칼은 어느새 채운이 들고 있다. 칼에 피가 묻어 있다. 아빠는 쓰러진다. 엄마는 칼에 묻은 피를 자신의 몸에 묻힌 후 경찰을 부른다. 엄마는 교도소로, 아빠는 뇌사판정으로 병원에 입원한다.
채운은 아빠를 면회하며 깨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아빠가 깨어나 자기를 찌른 사람이 누군지 밝혀질 두려움과 경찰에 자수해 교도소에 있는 엄마를 풀어주고 싶은 마음과 싸운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엄마는 말로 다 풀어내야 하는 사람, 아빠는 속으로 끌어안는 사람이었다. 흐릿한 공장에서 두 사람은 늘 다투는 일이 일상이었다. 늘 손해 보고 장사한다고 타박당하는 아빠는 천성을 고칠 수 없다. 그런 아빠를 보는 엄마의 속은 늘 불처럼 타올라 화병에 이르렀다. 각혈을 하고 가슴이 아프다는 엄마는 방에 누워있는 날이 많아졌다.
부부의 대화는 끊겼고 집안일은 내 몫이 되었다. 엄마를 돌보고, 그때는 손빨래를 했었기에 그게 제일 싫었다. 엄마 옆에서 나는 뭔가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뭐라 건넬 말이 없어 그냥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 그때 나는 어렸기에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냥 엄마가 아픈 줄로만 알았다.
난 그때 엄마가 미웠다. 그런 못된 마음을 가졌던 어린 내 마음이 이 나이 먹도록 가시지 않는다.
◸다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결국 그 마음을 내려놓는 것◿ - p215
지우는 엄마가 일하는 식당에 자주 오는 채운의 가족이 늘 부러웠다. 부모님과 밥을 먹고 커다란 반려견 뭉치가 항상 옆에 있는 것.
어느 날, 식당에서 힘들게 일하는 엄마를 본 후, 화가 난 지우는 뾰족한 송곳을 들고 아빠를 찾아간다. 가는 도중 채운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지우는 어느새 집으로 발길을 돌리고 집었던 송곳을 버린다.
소리는 엄마의 무덤 앞에서 못된 마음을 품어서 미안하다고 털어놓는다. 엄마의 영혼이 소리를 감싸며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누군가를 잡은 손과 놓친 손이 같을 수 있다'고 속삭인다.
채운이 받을 벌을 대신 받고 있는 엄마는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라고 말한다. 오히려 엄마가 미안하다며.
채운은 평생 마음의 벌을 받으며 살아갈 것이다.
내가 하루 종일 뱉는 말, 글로 쓰는 말, 마음에 담아둔 말, 이 모든 말 중에 몇 가지는 거짓이 있다. 그 거짓을 가려내는 건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매 순간 바뀌는 내 마음을 되도록 양심에 가깝게 그저 다독이며 살아가는 일. 그게 최선이라 믿으며 살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