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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 첫눈을 그냥 넘어갈 순 없어요.

by 달자
©DalJa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여기는 어젯밤, 바람과 함께 눈이 왔어요. 저는 재활용쓰레기를 버릴 겸 모자를 쓰고 나갔지요. 눈은 이미 온 동네를 하얗게 만들어놓았어요. 전 동심에 젖어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어요. 눈발이 내 몸에 들어와 온몸이 오그라들었는데도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 다녔지요.

왠지 몰라도 눈이 무척 반가웠어요.




©DalJa

눈이 그친 오늘, 햇살이 내 방을 정면으로 비춰주네요.

눈이 물방울이 되어 베란다 난간에 잠시 머물러요.

햇살이 물방울에 빛을 쏘아 보석처럼 반짝여요.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다섯 개...

와, 똑 떼어내고 싶어요. 누가 볼세라 감추고 싶을 만큼 예뻐요.

내 손이 닿으면 사라지겠죠? 아니, 내가 볼일 보고 오면 이미 사라져 있을 거예요.


저는 눈을 꼭 감고 따사로운 햇살로 내 몸을 소독하듯 가만히 받아냈어요. 너무 좋았어요.

햇살로 환해진 내 방에 흩날리는 먼지도 제거하고, 창문에 훤히 보이는 얼룩도 쓱쓱 닦아냈답니다.

밖을 보니 난간에 주렁주렁 매달린 보석들이 떨어지고 있네요.


©DalJa


사실 어제는 난방이 안 되는 딸방을 고치는 동안 눈이 펑펑 쏟아졌기 때문에 난 눈 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어요. 난방 기사님은 다 고치고 그새 어두워진 밖을 보았죠. 그 순간, 기사님은 당황하는 눈치였어요.

우리 집을 고치는 동안에도 휴대폰은 쉴 틈 없이 울어대고, 끼니도 거르며 이 집 저 집 겨울철 난방 구동기를 고치러 다니며 차를 몰아야 하니 마음도 급하고 배는 또 얼마나 고팠을까요. 아무튼 첫눈이 원망스러웠을 거예요. 그래도 기사님 덕분에 딸내미는 어젯밤 따뜻하게 보냈다네요.


누군가에게는 미운 눈, 누군가에게는 예쁜 눈.

난 적어도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며 행복한 감상에 젖었더랬죠.

그러고 보면 눈이란 것은 모두에게 사랑받는 건 아닐 거예요. 눈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많을 테니까요.




전 예전에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발버둥 치며 살았던 적이 있었어요. 지금은 기억조차 없는 아주 젊었던 시절이죠.

모든 이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곧 마음에도 없는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했지요. 누군가의 어려운 부탁도 쿨한 척 받아들이고 이런 말과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좋아해 주겠지? 나만 바라봐 주겠지? 뭐 그런 생각들이 있었지요. 내심 거리끼는 일들을 나서서 하기도 해서 너무 과한 에너지를 소비하며 살았어요.

시간이 흐르니 과하게 쓴 에너지가 고갈이 됐는지 지금은 누구의 말에 뾰족하게 가시를 세우기도 하고, 웃상이 울상이 되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나 가시 돋친 말들이 혹시 누군가에게 대못을 박았을까 봐 이미 사고 치고 후회하는 날이 많아졌어요. 전 그렇게 날 세우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모든 게 내 뜻대로 안 되고, 나만 뒤처진 것 같아 내가 나를 다스리지 못하고 있어요. 어른답지 못한 거죠.

그래서 아직 멀었지만 조금씩 날 선 나를 무디게 만들려고 노력 중이에요. 지나간 일에 너무 집착하지 않고 나를 신경 쓰지 않는 사람에게 굳이 잘 보이려고 하지도 않고요.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려고요.

나에게 무리한 부탁은 정중히 거절하는 방법도 곰곰 생각 중이랍니다. 생각하는 동안 마음이 무겁지만 빨리 떨쳐내려고 해요. 인간관계는 내가 잘한다고 해서 오래오래 이어지는 건 아닌가 봐요.

어쨌거나 갈수록 줄어드는 내 주위의 연결고리가 느슨해져 가볍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욕심을 빼고 순수하게 상대의 모습만 바라보는 것, 내가 눈이 오면 뒷일은 생각도 않고 좋기만 한 것처럼 그런 순수한 관계의 사람이 내 옆에 있다면 좋겠어요. 내가 진심으로 축복해주고 싶은 사람말이에요.

그럼 일단 내가 변해야 해요. 세상의, 누군가의 잣대로 나를 비교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삶을 추구하는 나로 말이에요.


내 삶에 불필요한 말과 성가신 감정들을 하나둘 씩 지워내고 적당한 말과 필요한 침묵, 정갈한 행동으로 나를 바꾸려고요.

내가 글이 쓰고 싶다고 해서 술술 써지지 않는 것처럼, 내가 나를 바꾸고 싶다고 해서 금방 바뀌지 않겠지만 며칠 걸리며 쓴 글이 어느새 하루 만에 써지기도 하듯이 언젠가는 나도 정말 괜찮은 나로 바뀔 거라고 믿어요. 그만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요.




눈은 다음에도 올 테지만 첫눈이라는 감상에 젖어 다시는 못 볼 것처럼 한참 눈밭을 걸었어요. 아직 가을이 마음에 남아있는데 이제 정말 가을을 보내야겠어요.


날씨 때문에 힘든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추운 겨울이지만 따뜻하게, 번잡스러운 눈이지만 하얀 눈으로 정화되는 날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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