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 속 느낌들.
오전의 햇살이 기분 좋게 따갑다. 뜨끈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난 후 샤워실 문을 열고 나오면 확 끼치는 썰렁한 기온에 몸을 한 번 뒤척인 후 환하게 비추는 햇살에 젖은 몸을 말린다.
햇살로 인해 부옇게 유영하는 먼지들이 몇 개인지 셀 수 있을 만큼 뚜렷이 보인다. 창문을 꼭 닫고 있어도 쌓이는 회색먼지들은 오래된 가구처럼 보고도 못 본 척 그냥 지나친다. 나의 들숨에 수만 개의 먼지가 입과 코로 들어가도 상관없을 만큼 무해한 햇살이 나를 보호해줄것 같다.
차 한잔을 준비하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펼쳤다. 요리조리 겉과 뒤를 훑어보고 어떤 내용일까? 궁금함과 설렘을 느끼며 한 장 한 장 넘긴다.
펼치는 순간 오래된 냄새가 코끝을 찡하게 하고 아주 조그만 책벌레가 빠르게 도망간다. 마치 몇 만 년 전의 생명인 것처럼 느껴져 쉬이 죽이지 못한다. 하얀색이었을 종이가 누르스름해져 있고 책 장을 넘기는 손 끝의 감촉은 보드라워서 종이라기보다 갓난아기의 얼굴을 닦아내는 얇은 면포 같은 느낌이다.
가난한 여인은 어릴 때부터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아이를 낳고 세 달이 지나 남편은 철로에서 생을 마감했다. 기차가 온다는 걸 알면서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냈다.
여인은 철로를 걸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이 자꾸 꿈에 보인다. 그 뒷모습의 남편을 떠올리며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여인은 이웃의 소개로 4살 된 아들을 데리고 8살 된 딸이 있는 남자에게로 시집을 간다. 이 남자 또한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다.
하지만 여인은 전남편이 자살한 이유가 뭔지 끊임없이 머리에서 맴돌아 분함과 슬픔이 섞인 하루를 버텨내며 살아간다.
여인은 간혹 사팔눈이 되었던 남편처럼 사팔눈의 남자를 보고 홀린 듯 쫓아간다. 초점 잃은 눈, 목적지도 없이 허적허적 걷는 남자.
멀어지는 남자를 놓친 후, 여인은 주저앉아 하염없이 운다. 그제야 여인은 남편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어느새 새로운 남자 품에 안겨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여인은 마음으로는 죽은 전남편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마음과 다르게 현남편이 죽은 전 부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질투심을 느끼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질투심이 정말인지 아니면 전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숨기기 위한 처세술인지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대체 사람의 마음이란 어떤 걸까. 이불이나 베개, 자신의 것이 아닌 냄새에 언제까지고 익숙해지지 않은 채 저는 몇 번이고 그렇게 다가오는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때만은 죽은 당신도, 당신의 뒷모습도 머릿속에 접어 넣고 요란하게 넘실거리는 바람과 파도의 한복판에서 살짝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발췌
가까운 사람이라도 그 속마음의 정체는 도저히 알 수 없고 시간은 흘러 또 누군가로 인해 대체되는 현실과 비현실의 부조화를, 햇살이 빛을 뿌려 바다가 잔잔히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미쳐 날뛰는 거친 파도로 돌변하는 자연의 섭리처럼 여인은 이내 자연에 순응하듯 지금의 남편은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깨닫게 된다.
글을 읽다 보면 어느 문장에 밑줄이 진하게 그어있다. 갑작스러운 밑줄에 훅 한숨이 흘러나왔다. 삐뚤빼뚤한 밑줄의 거북함이 잠깐 스쳤다가 그 부분을 다시 한번 읽어봤다. 내가 지나친 문장에서 이 사람은 무얼 느꼈던 걸까?
이 사람도 나처럼 여인의 걸음을 쫓아 그 마음을 읽어내느라 마음이 울렁거리고 뻐근했을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나에게 온 소설 속 여인은 행복했겠다 싶은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 형식의 글이기에 여인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들어줬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기계로 찍어낸 책 속에 여러 사람의 흔적과 직접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을 사람이 떠올라 덜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참으로 청승맞은 이 느낌, 나도 뭔지 모를 것들을 꿈꾸다 문득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 되었음을 느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뭔가를 잃어버리는 일의 연속이다. 그 뭔가는 늘 모호하다. 그러나 말끔하게 정리된 이야기에서는 거짓의 냄새가 난다. 거짓은 잃어버린 그 모호한 것에서 기인하는 외로움과 불안에서 온다. 그 외로움과 불안 역시 모호하니 거짓말이라도 해서 살아야 한다. 살아가려면 그 거짓을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뭔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살아가기 위한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 송태욱(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