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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산책 중

▶ 걷다가 머문 자리

by 달자
©달자

겨울이 가까워졌네. 지나가는 가을이 아쉬워 여기저기 눈에 담으며 천천히 걸어간다. 걷기에 안성맞춤인 운동화를 아직 찾지 못해 디디는 발걸음이 좀 무겁다. 걷다보면 그게 이유인지 몸이 무거운 건지 그냥 걷는 것이 싫은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걷기도 처음 마음처럼 집중력이 필요하다.


호수를 가르는 바람, 나무의 정령들, 대지에 뿌리내린 생명의 기운이 합쳐져 내가 느끼는 공기의 신선한 흐름이 내 오감으로 들어와 머리를 맑게 해 준다. 침침한 눈이 크게 떠지고 고개가 하늘로 향한다. 후욱, 숨을 크게 마시고 뱉는다.


©달자


내가 나를 잊기 위해 책 속에 빠지듯 걷는 것도 그렇다. 걷기를 반복하다 보면 생각이, 삶이 나를 벗어난다. 내가 없는 시간들에 구속되지 않고 현재의 나는 뭐든 할 수 있겠다는 긍정에너지가 솟는다.


낙엽으로 뒤덮인 길, 잔디밭 길, 푹신한 지푸라기를 두껍게 엮어놓은 길, 흙길, 여러 길을 걷노라면 제일 편한 길은 시멘트길이다.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네 몸이 흙을 밟을 때 기분이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편편한 시멘트길이 훨씬 딛기가 편하다. 자연스레 만들어진 길보다 인위적인 길이 더 좋은 건 신발 코에 거추장스럽게 걸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리라.


건조한 낙엽들 사이로 조그맣고 보송한 꽃송이 하나가 노랗게 얼굴을 내밀었다. 찰칵^^

©달자


까치야 나 좀 봐봐.

©달자


길을 걷다 보니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야트막한 지붕의 초가집이 보인다. 그 집보다 두 배는 큰 식당이 있다. 주위에는 빨간 벼슬을 휘날리며 겅중겅중 까만 닭들이 서너 마리 돌아다닌다.

돌담 길을 돌아 어느 한 지점에는 까맣고 통통한 개가 누워 잠을 자고 있다. 식당의 혜택을 누리는 복 받은 개다. 주는 대로 다 받아먹은 개는 배불러서 행복할 텐데, 장수하기는 글렀다.


외부의 식탁에 앉아 오손도손 식사를 하는 사람들. 하하 호호 정겨운 대화소리와 달그락거리는 수저소리가 내 귀에 걸린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 속에 난 왠지 소외감이 든다. 나도 끼어서 웃고 싶다. 웃어젖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걱정거리 하나 없어 보인다. 푸하하, 나도 따라 웃어본다.


울창한 숲길이 나왔다. 오른편으로 꺾기 전, 아까 식당 개보다 훨씬 큰 개가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길을 잃었나? 어떤 목적지도 없는 것 같고, 주인도 없는 것 같고, 분명 목줄을 거는 목걸이는 하고 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눈을 마주치려 했지만 땅만 주억거리며 나와 거리를 두고 도망간다. 나는 주인이 올까 잠깐 서성대다 그냥 지나쳐간다. 아무쪼록 주인이 어디선가 나타나 데려가면 좋으련만.

인간 팔자만큼이나 개팔자도 가지각색이다.




©달자



어스름 질 무렵, 난간에 기대 반짝이는 윤슬을 보다 문득 생각에 잠긴다.

누구나 한 번쯤 앞이 막막할 때가 있다. 남들은 그 막막함을 어떻게 견디고 헤쳐나갈까? 궁금하다.


나도 막막할 때가 있었다. 내가 있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던.

내가 문을 열고 나가면 되는 것을 차마 열지 못했다. 내 등을 바라보고 있는 많은 것들이 떠올라, 미래의 나를 믿을 수가 없어서 용기 내지 못했다. 그런 용기가 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난 없을 것이다.

가끔 아니 수시로 문고리를 잡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남편은 아버님 모실 산소에서 무럭무럭 잘 자란 감나무의 감을 많이도 따왔다. 그 감을 잘 매달아 곶감으로, 연시로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가을 햇살에 감들은 주인이 바라는 대로 잘 익어갈 것이다.


나란히 무덤이 있는 산소 주변에는 혼령들이 살까? 그 혼령이 여기저기 머물면서 이 땅의 생명들이 잘 영글도록 숨을 불어넣을지도 모르겠다. 후손들이 조상을 향한 제를 올리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딱딱한 감이 곶감으로, 연시로 익으면서 혼의 숨이 좋은 기운으로 바뀌면 좋겠다. 신기한 자연의 선물이다.

천연의 달콤함이 입 안으로 들어올 때 모든 생각은 단순해진다. 와, 하나 더.


쓴맛같은 인생을 가끔 있는 달콤한 맛으로 덮고 오늘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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