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 아빠
길을 걷다 보면 햇살이 따사로운 곳과 햇살이 미처 닿지 않는 곳이 있다. 가을햇살을 듬뿍 먹은 나뭇잎과 하루 종일 응달인 곳은 아무래도 많은 차이가 난다.
멀리서 보면 다채로운 색깔이 잘 조화된 듯 멋있게 보여도 막상 가까이 가보면 처참하게 헐벗고 거무튀튀한 곳이 많다. 그런 것들까지 다 섞여서 멀리서는 예쁘게 보이는 것이다.
내가 다른 이의 삶이 아무리 부럽다한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비슷하게 고민거리를 가지고 부대끼며 살아가듯이 힘든 길, 평평한 길, 오르막 길, 내리막 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어찌 됐든 내가 갈 곳은 가게 되어있다.
울 아빠. 아빠의 목소리는 어찌나 다정한지 모든 사람들이 아빠와 대화하다 보면 맑고 순해진다. 아빠가 식사할 때의 씹는 소리는 또 어찌나 경쾌한지 다들 입맛이 확 돈다고 했었다.
엄마가 아무리 허술하게 밥을 차려도, 어제 먹었던 국과 반찬을 고대로 내놓아도 군소리 없이 맛있게 드시는 울 아빠. 내가 울 아빠를 닮아서 밥투정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나 보다.
늘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일하는 것밖에는 모르고 살았던 울 아빠, 그게 삶이고 낙이라고 자신에게 세뇌시키며 살았던 건 아니었을까?
그런 울 아빠가 얼마 전 뇌경색으로 오른쪽 팔다리가 불편해졌다. 늘 잘 쓰던 팔다리가 맘처럼 안되니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화가 올라왔다.
큰 병원만 갔다 오면 괜찮아지리라 했건만 의사는 더 이상 치료할 게 없다고 퇴원하라고 했다.
그래, 더 이상 심하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은 했으나 아빠의 얼굴은 실망으로 가득해서 흔들리는 아빠의 어깨를 감싸 안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아빠를 보러 친정으로 향했다. 평소와 다르게 무거운 발걸음인 데다가 뭔가를 사가야 할 터인데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음이 무거우니 손에 뭔가를 들고 가는 것조차도 벅차고 발에 무거운 추를 단것처럼 걸음이 더뎠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친정집 냄새가 확 끼쳐왔다. 반가운 부모님 냄새.
울 아빠가 웃는다. 어설프게 일어나 손을 내밀어 나를 반겨주었다. 애써 웃는 얼굴이 조금 비뚤어져 보인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웃는 모습이 무슨 암환자처럼 보여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아빠는 머리 감기 귀찮다고 빡빡 밀어버렸다고 모자를 벗으며 나에게 보여주셨다. 하얗게 송송 난 머리를 보니 웃기기도 하고 먹먹하기도 해서 와, 아빠 얼굴 엄청 커 보이네,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아빠는 그동안 운동 많이 했다고 보행기를 끌며 거실을 걸어 다니셨다. 이제 받아들이신 건가 싶을 만큼 많이 웃으셨다.
엄마는 아빠의 머리를 밀면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내가 암에 걸려서 친정으로 불쑥 쳐들어간 날 엄마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기계적으로 밥을 해주셨다. 숭덩숭덩 빠지는 머리카락을 본 후에야 엄마는 현실이 보였는지 가슴으로 눈물을 삼키며 내 머리를 밀어주셨다.
그런 엄마였는데 이번에는 아빠의 머리를 밀어주던 날, 또 그렇게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불쌍한 울 엄마, 네 번의 뼈수술로 마음이 저 밑바닥에 있을 터인데 하필 아빠까지 쓰러지고 나니 엄마는 평소보다 더 기운 내서 움직여야 했다.
아팠던 딸에게 삼시세끼 밥을 해주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남편을 위해 밥을 지어야 했다. 성한 몸으로도 힘든 병시중을 하려 하니 엄마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근심의 눈물이 시냇물 흐르듯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있어봐야 고작 이틀이라 밥하고 청소하며 낯익은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아빠 방 창가에 가발 두 개가 나란히 얹어있다. 울 아빠가 저기 있는 가발을 쓰고 문밖을 나갈 일이 있을까?
열 배는 더 젊어 보이게 했던 가발 두 개가 안쓰럽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먼지만 부옇게 쌓이겠네.
그리고 오늘,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빠가 보행기를 끌고 산책하고 왔다는 전화였다. 휴~ 다행이다.
아빠가 옛날처럼 잘 웃으시고 밥도 잘 드신다는 말이 들려오면 더 바랄 게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