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삭하고 빠직하다
“빨래, 등교 그거 말고 애 보는 게 더 있냐? 웅이 거저 키웠지.”
"에그그, 니가 그렇지 뭐, 실수겠지 뭐, 또 딴생각했겠지."
"네가 그래서 일하고도 좋은 소리 못 듣는 거야. 왜 뭐든 똑바로 안 해?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텅 빈 가게, 설거지를 하면서 원재의 말들이 떠올랐다. 그릇 하나에 한 문장, 원재를 미워하는 시간이 왔다. 원재는 말을 참 과자처럼 했다. 언제나 바삭해서 재밌지만, 참는 동안 어금니를 꽉 깨물어서 두개골이 빠직하는 착각이 들었다.
"정서방이 다 고치고는 웬일로 용돈을 100만 원 주고 가더라. 집에 바로 갈 거면 젓갈하고 회를 사주겠다고 하니까, 들릴 때가 있다고 하더라. 가게 일, 선아 너 혼자 해도 되긴 해? 쉬엄쉬엄 일해라. 몸 삭는다."
아버지를 찾아간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마지막 인사 거나, 나에 대한 마지막 신호거나. 먼저 욕한 사람이 제일 큰 잘못, 먼저 집 나간 사람이 제일 큰 잘못. 내게 잘못의 크기가 중요한 걸까...
설거지가 끝나면서, 원재가 했던 못된 말들의 볼륨을 줄였다.
"내가 이래서 당신이랑 호계 싫어하는 거야."
내가 늘 하는 대답, 시큼한 눈으로 말을 내뱉었다. 호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원재의 친구다. 직업이 불분명하다. 남편도 이야기를 잘 안 해준다. 어디 오락실을 한다느니, 피시방을 한다느니, 노래방을 한다느니,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서 돈 되는 일이라면 손 안대는 곳이 없다는 말도 있다. 내 눈에는 그저 낮부터 술이나 마시고, 동네에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우연히 열었던 차 트렁크에는 삽도 실려있다. '삽질하세요?' 질문하면 껄껄 웃는다. 세상 가장 호인처럼 웃는다. 호계가 나가는 날까지도 거의 매일 가게로 찾아왔었다. 들어올 때 인사는 '오늘도 안녕하시지예?', 그러면 대답은 '입장료 내세요.' 진심을 다해 말한다. 그래도 좋다고 껄껄 웃는 모습이 사람 좋아 보인다. 남들에게 보이는 게 제일 중요한 사람, 색안경이 씐다. 원재와 10분 정도 담배를 피우고, 20분 정도 커피를 마신다. 10분 정도 오늘 일정을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마지막 5분은 부인 욕을 하고 간다. 내 앞에서, 내 눈을 보면서,
"여자들은 왜 그래? 그게 뭐 중요한데?"
대충 이야기는 이렇다. 부인이 옷장에 옷이 없다고 하길래, '아줌마가 무슨 옷이야, 뱃살이나 빼.' 했더니, 짜증을 내더란다. 아줌마보고 아줌마라고 했는데, 화를 냈다고. '야!' 했더니, 듣기 싫다고 하길래, '그쪽'이라고 했다. 그래서 화를 내길래, '자네'라고 했다. 농담으로 한 건데 화를 불같이 냈다. 갱년긴가.. 하고 웃었다.
밖에서 먹는 밥이 하도 지겨워서, 오랜만에 점심 먹으러 집에 갔다. 밥도 없고, 밥그릇을 제대로 안 씻어서 고춧가루가 묻었다. 설거지를 어떻게 배웠길래 이렇게 하냐고, 제대로 하라고 했다. 그런데, 화가 나서 삿대질을 하면서 '놈팽이'라면서 파르르 떨더라. 냉장고 탈탈 털어서 음식 하는데, 맘대로 하더라. 음식을 레시피대로 안 해서 '모르면 유튜브라도 보고하라'라고 했더니, 열폭해서는 '시켜 먹어, 개새끼야' 욕을 갈기더니, 그대로 지갑 들고 안 오더라. 치사하게.
"제수씨, 본인이 잘하면 그런 소리 안 듣잖습니까? 아니라요? 입장차이 아닌가?"
호계, 당신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제 생각이 중요한가요? 중요하면 말하고요."
그 이후로는 호계는 원재를 만나러 가게에 들어오지 않는다. 원재를 불러내서 담배만 피고 갈길을 간다. 호계가 쪽팔려서 못 오겠다고 했단다, 억울함을 몰라줘서 억울하단다. 호계를 못 오게 한 게, 나라고, 원재는 섭섭한 듯 말했다. '본인이 잘하면 그런 소리 안 듣잖습니까? 아니라요?' 답했다. 원재는 그대로 굳었다. 돌아오는 답은, '호랑이, 그래, 싫어하는 사람, 실컷 싫어하면서 살아.'
또 바사삭, 빠직. 호계가 치가 떨리게 싫다. 벌주고 싶은 마음이다. 본인이 밖에 놀러 다니면서 쓰는 몸과 마음만큼 부인에게 하면 화낼 일이 없다. 알아서 밥도 차려줄 것이다. 다정하게 불러주면 다정하게 안아줄 것이다. '틀린 말도 아니잖아.'라고 할 때, 눈을 까뒤집는다. 그 눈에 가시를 박고 싶었다. 흥분해서 사백안이 되면, 그 눈에도 가시를 박고 싶었다. 눈과 입이 모두 튀어나와서 바닥에 데구루루 구르는 상상을 했다. 호계의 부인은 아이 둘을 혼자 키우다시피 한다. '돈 갖다 주잖아.'라며 거들먹거리는 손목, 그 손목에서 챙그랑 소리를 내는 팔찌, 그런데 '놈팽이'라고 했을까? 앞뒤가 맞지 않다 못해 없다.
내가 호계라면 부인에게 잘할 것이다. 호계 같은 사람을 받아낼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없다. 호계가 가고 나면, 나는 늘 호계욕을 했다. '우라질 놈', 원재는 그런 나를 보면서 '내가 낫지' 했다. 호계는 원재를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면서 원재는 늘 덧붙였다. 애가 부족하고 어눌해서 그렇지, 해 끼치면서 사는 애는 아니라고. 사람들의 단점만 보고, 내치면 언젠가는 아무도 내 곁에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런 뜻이라면, 나도 원재에게 잘해야 한다. 원재에게 제일 잘하는 게, 원재가 원하는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은 원재가 원하는 대로 나갔으니, 그걸로 된 거다. 원재가 돌아오길 바라는 걸까? 고민해 본다. 결혼 전, 데이트 삼아 원재와 궁합을 보러 갔었다. 날 보고 대단히 무서운 호랑이라고 했다. 남편은 정답이라고 용하다고 했었다. 그러면서 철학관 관장은 원재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암만 센 호랑이도 개가 짖는 건 시끄럽고 힘들다. 적당히 해라."
웃지 못하는 원재와 웃음을 참지 못하는 나였다. 불쑥 즐거운 날의 원재가 튀어나온다.
감정이 짖고 간자리, 그가 휩쓴 자리, 심호흡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