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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오마주 Sep 15. 2024

5화. 비만혐오자

너의 혐오를 혐오한다


그땐 그랬다. 헤어지는 게 더 두려웠다. 결혼 전, 대구에 원재의 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다. 날이 좋다고 야외음악당이라는 곳에 가서 돗자리를 깔고 치킨에 맥주를 한잔하자고 했다. 그날은 무릎까지 오는 초록색 줄무늬 원피스를 입었었고, 앞으로 끈을 묶는 여름 원피스였다. 돗자리 위에 앉을 줄은, 아빠다리를 해야 할 줄은 몰랐다.


"덩치도 생각해야지, 원피스는 왜 입었어? 앉으면 다 보이잖아."


혐오였다. 술 한 모금에 한마디, 원재는 취할 만큼 마셨다. 그러는 동안 나는 돗자리 아래까지 내려갔다.


"우라질 놈."


화가 난 채, 숙소로 먼저 돌아갔다. 마실만큼 잔뜩 마시고는 돌아왔다. 그리고 친구의 전화, 잘해라 임마, 화해해라 임마, 얕게 소리가 들렸다. 사랑과 연애는 다른 문제다. 내면과 외면이 다르듯이, 둘이 있을 때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일 때, 원재는 나를 수치스러운 듯 대했다. 비만 혐오, 원재는 자신의 학창 시절을 자주 말했다. 뚱뚱했던 자신이 지금 생각해도 싫다고 했다. ‘난 마른 여자만 사귀었는데, 넌 특별해. 달라.‘그 말은 곧, 뚱뚱해서 싫지만 헤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혐오 행위, 원재만 나를 혐오했을까? 나도 내가 혐오스러웠다. 혐오로 인한 무력화. 사랑이라는 감정을 무력화시키는 일이다.


"남들 앞에서 꼭 핀잔을 줘야겠어?"

"너도 꼭 그런 옷을 입어야겠어? 최소한이라도, 가리려는 노력도 안 하잖아! 왜 젊은 날을 이렇게 살아? 꾸미고 가꾸면서 살아! 쫌"

"비만 혐오자."

"뭐? 소설 쓰냐?"


짝, 소리가 났다. 내가 원재의 뺨을 때렸다.


"썅년이!"


이성을 잃은 원재는 내 얼굴과 머리를 쉴 새 없이 때렸다. 목을 쥔 것도 아닌데,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눈을 뜬 채 원재를 계속 쳐다봤다. 사백안의 원재는 조금씩 마취가 풀린 듯 표정이 바뀌고 있었다. 마침내, 울고 있었다. 그러다가 원재의 동공이 위로 반짝이며 자기 얼굴을 감쌌다.


끝인가? 그제야 내뱉는 숨, 숨 쉬는 게 이렇게 힘든 거였나? 뜀박질을 하고 내뱉는 숨이었다. 숨을 헥헥거리다가 공기가 볼에 닿는 게 느껴졌다. 얼굴에 전기가 통했다. 아팠고, 슬펐다.


정말 끝났구나, 안도했다. 화장실로 들어가서 찬물에 세수를 했다. 눈물범벅과 약한 감정들도 씻었다. 아주 잠시였는데, 정말 잠시였는데... 화장실 거울을 확인했다.


‘아-악!’


큰 비명소리에 원재는 소리 내어 울었다. 원재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날의 진아처럼. 사랑을 잃은 진아처럼.


"미친놈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야! 그냥 죽여라 죽여! 썅노무새끼야!"


눈에 핏줄이 터졌고, 목은 파랗게 변했다. 온몸에 피를 퍼 나른 듯 얼룩덜룩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미친놈이지, 미안해, 내가 다시 안 그럴게."


원재는 무릎을 꿇고 내 다리를 붙잡았다.


"선아야, 내가 죽을죄를 지었다. 인생 이렇게 끝장나기 싫어. 네 손이 얼굴에 닿을 때, 정신이 해까닥 나갔나 봐. *갑자기 무언가가 내 몸을 쇠사슬로 칭칭 동여매는 것 같았어. 참을 수가 없더라고. 이 방에 벽들이 나를 가두는 감옥 같았고, 달려온 너는 나를 가두는 간수 같았어. 넌 몰라. 그 절망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우라질 모순. 그땐 그랬다. 사람이란, 누구나, 실수한다. 그렇다고 해도, 안아주고 받아주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몰골이 우스워 출근도 못하고 전화로 퇴사했다. 보름 만에 찾아간 회사에는 집안 문제, 아빠에게는 회사문제라고 했다. 내가 갈 곳은 어디였을까, 바닷바람이었을까, 사냥개였을까?


그렇게 함께 살기 시작했다. 밤에는 모자를 쓰고 데이트를 했다. 멍든 얼굴에도 원재는 키스를 했다.

원재와 함께 하지 않는 나를 상상할 수 없었다. 정말, 갈 곳이 없었다. 우리에게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의 결정체, 정영웅. 원재는 아이를 정말 갖고 싶어 했고, 애정을 다했다. 늘 아버지로 사는 책임을 다했다. 웅이를 키우며, 자신의 소신을 말했다. 애는 혼내가며 키워야 한다, 우리 때는 맞으며 자랐다, 육아 철학으로 '훈육'이라는 단어를 붙여 몰아세웠다.


"혼자 말도 없이 가? 길 잃고 울며 불며 짜봐야 정신 차리지?"

"킥보드 탈 때 좌우 살피라고. 차에 치여봐야 정신 차리지?"

"너, 모르는 사람 누가 따라가래? 끌려가봐야 정신 차리지?"

“그런 거 먹으면 뚱뚱보 되는 거야, 뚱뚱해지면 취업도 못하고, 여자도 없이 늙는 거야!”


험한 말을 하는 원재. 아빠가 아이를 훈육할 때는 엄마는 간섭해서는 안된다. 아이에게도 매우 좋지 않다. 하지만, 언어폭력을 보고 모른 척하는 건, 방임이다.

 

"오빠,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어. 근데, 애는 건드는 즉시 너 죽고 나 죽어."


거짓은 하나도 없었다. 한순간 공기가 멈췄다. 원재와 내 눈은 정면으로 마주했다. 살기와 원망이다. 원재에 대한 두려움, 나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한다. 나의 두려움, 양파를 썰기 위해 칼을 갈 때, 재즈를 듣는다. 알게 하려고. 가끔은, 정말, 홧김이라는 핑계로 원재를 찔러 버릴 것만 같았다.


원재가 감정을 뿌리듯 떠나고 나니 우리의 불안이 더 잘 보인다.


그때 헤어졌다면 좋았을까, 원재를 기다리는 시간에 모든 불안이 사라지는 것만 같다. 원재는 알고 있었을까?

가끔 원재가 내 배를 보며 아래위로 훑는 표정이, 살 많은 거 자랑하냐며 배를 툭치는 행동이, 보랏빛 얼굴을 떠올린다는 것을. 우리의 불안을 꺼낸다는 것을. 침묵의 이유는 내 안의 살인마를 깨우지 않기 위함임을.


로망과 현실은 항상 다르다. 사랑이라 생각하고 결혼한 줄 알았는데,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결혼한 것은 아닐까, 그게 결과적으로 사랑일까, 나 자신에게 물었다.


10일이 10년보다 짧다. 더 기다리기 힘들 것 같다.

정리, 해결, 그리고 새 출발.


내게는 지금보다 나은 내일이 필요하다.

그에게 연락해야만 했다.


"원재 씨, 돌아와. 원하는 대로 해줄게."



2017, copyright ©윤종주 All rights reserved

________

*모순 86쪽 오마주

그림 출처 : http://www.mu-um.com/?mid=03&act=dtl&idx=5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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