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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느와르 7화. 검은 알약

oh오마주 오리지널. 창작소설

by oh오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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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배부른 자는 없었다.


배부름은 행복이다. 혹은 행복이 배부름이다. '행복'이라는 말은 다소 무책임하다. 국민을 위해 만들었다던 국어사전에는 '복된 운수'라고 했다. 인생을 운에 맡기다느니, 준비된 자만 성공한다느니... 동서남북 이야기는 뜻도 동서남북이다. 벽에 붙이면 벽보, 바닥에 붙이면 바닥스티커, 세워놓으면 입간판, 공중에 띄우면 플래카드다. 그래서 무책임하다는 거다. 엄마의 자리에 앉았다고 엄마라고 부르는 건 아주 많이.


연의 어린 기억에는, 동은 배불리 먹는 일이 없었다. 소리도 없이 몇 시간이고 울곤 했다. 아주 느린 걸음으로 주방을 향했다. 부엌 찬장에서 넓은 미제 초콜릿을 꺼내, 한 칸을 부숴 입에 간신히 넣었다. 아기 새가 드디어 세상에 나온 것처럼 입을 열었다. 눈물 나도 닦지 않았다. 애써 감추려는 기색 없었다. 연은 동처럼 '우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했다. 우느냐고 물어보면 '아니, 하품.' 대충 대답하곤 했다. 입에서 녹아 침이 고이면 침을 흘릴 때도 있었다. 연은 거실에 앉아 주방을 바라봤다. 주방의 작은 창으로 찢어진 노란 햇살이 넘어왔다. 동이 검은 그림자 같았다. 눈을 찡그리며 천천히 다가가면, 동이 초콜릿을 하나 더 입에 넣고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로 눈이 붙어 버린 듯이, 그대로 멈춰 서있었다. 손 끝과 발끝은 무용가를 흉내 냈다. 코로 숨을 크게 빨아 당기고는, 또 숨을 크게 참고, 날갯짓을 마친 새처럼 한참을 웅크려 있었다.


연은 가끔 동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두 걸음 뒤로 가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시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천천히 읽었다. 동에게서 어떤 글들이 샘솟고 있었다. 마침표에서 한 박자 쉬고, 문장은 또 이어졌다. 동을 둘러싸고 있는 글들을 연은 천천히 소리 내어 읽었다. 글들은 대체로 감정에 대한 것들이었으며, 먼저 멈추는 법이 없었다. 글이 지겨워 하품이 두어 번 나고, 엎드려 잠들어야 끝이 났다.


연이 학교를 들어가기도 전이다. 붉은 노을이 거실 창가에 오래 머물렀던 여름이었다. 한 여름은 오후 네 시가 가장 덥다. 마당 쪽 수돗가에 손을 씻다가 무지개를 발견하고, 한참 노을 밑에서 놀고 있었다. 어둠은 새끼발가락부터 들어왔고, 새끼손가락부터 들어왔다. 그러다 온전히 마당을 삼키고, 거실을 삼켰다. 어둠을 등에 가득 싣고 연은 해맑게 웃으며 마당에서 거실로 들어왔다. 마룻바닥에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동은 초콜릿 하나에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었다. 연은 동을 부르지 못했다. 어린 연은 젖은 발로 거실을 걷다가 미끄러져 머리를 찧었다. 동은 두 손으로 자신을 귀를 누르고, 더 작게 웅크렸다. 연은 없었던 일이라는 듯이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맨몸으로 동의 곁으로 갔다.


"오늘 붉은 노을이 나무줄기가 되는 걸 봤어. 나뭇가지에 무지개가 걸려 있었지. 엄마, 세상이 온통 엄마가 좋아하는 초콜릿 빛깔이야. 일어나. 배고프다. 밥주라."


연은 까치발을 하고 꺼진 거실의 불을 켰다. 불이 켜지는 순간, 모든 어둠은 바깥으로 도망가고, 연의 눈에 한가득 별만 남았다. 동은 고개를 들어 연을 본다. 사랑과 경멸의 눈을 하고, 동정과 배고픈 몸짓으로.


얼굴 없는 누군가 들어오고, 치워지고, 채워졌다. 연의 여린 몸에도 갑옷 같은 공주 잠옷이 입혀졌다.


동은 음식을 하지 않았지만 연은 굶지 않았다. 항상 청소가 되어 있었고, 밥솥은 밥이 꽉 찼고, 반찬은 열 가지가 넘었다. 연이 좋아하는 반찬부터,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반찬, 국도 항상 냉장고에 세 개씩 있었다. 적절히 식었을 무렵 먹었고, 적절히 차가워졌을 무렵 냉장고에 들어갔다. 그런 일을 도맡아주던 사람들은 동에게 길게 말하지 않았지만, 왔습니다, 갑니다, 쉬세요. 했다. 동은 말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길게 끄덕이지 않았다.


동은 밤이 되면 말이 많아졌다. 전화가 울린 뒤에 웃는 일도 있었으며, 우는 일도 있었으며, 밥을 먹는 날도 있었다. 사전을 꺼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찾기도 했다.


"우즈 이즈 마이 대디?"


연이 배우지 않은 영어를 하면 동은 그림자 같던 느린 동작을 멈췄다. 그리곤 어려운 문장들을 끊임없이 해댔다. 어린 연은 엄마가 전화를 받을 때처럼, '예스, 예스, 예스, 예스, 아 갈 릿, 에이-에스-에-피'등을 마음 가는 대로 말했다. 연은 연의 이야기를 하고, 동은 동의 이야기를 했다.


중학생 때부터 집전화는 없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집은 깨끗했으며, 반찬은 늘 많았다. 연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집에 있는 시간이 줄었고, 반찬은 없어졌다. 동은 가끔 헛소리로 집을 더욱 춥게 만들었지만, 연에게 공부하라든지, 야식을 먹지 말라든지, 좋은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연은 자신에게 외국인 아버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밥보다 빵이 맛있으니까, 국수보다는 파스타가 더 좋으니까, 딸기잼보다 땅콩버터잼이 더 좋으니까. 얼굴에 주근깨가 많으니까. 동공이 갈색이니까.


그리고 금기된 초콜릿을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엄마처럼 천천히, 입안에서 녹였다. 온몸이 타올랐다. 눈알이 빠질 것만 같았다. 피가 역류하는 듯한 역겨움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나무바닥이 부서져라 뛰어서 화장실로 갔다. 변기를 잡고 먹은 모든 것을 토해내고 눈물을 닦았다.


동은 말없이 뒤에 서 있었다.


"너, 먹은 거니?"


동은 반쯤 잠긴 눈으로 연의 어깨쯤을 보고 있었다.


"엄만, 정말 미친 거야? 아님 뭐야? 이거 뭐야? 우웩, 올릴 것 같아."


"너, 먹은 거냐고?!"


동이 화가 난 듯한 눈썹을 계속 보고 있었는데, 연은 스르르 눈이 감겼다. 연은 세상에서 가장 아픈 사람들의 세상으로 초대되었다. 그곳에서는 초콜릿을 먹는다. 바삭함도 촉촉함도 없는 널빤지 같이 생긴 검은 알약을 손으로 정성껏 나누어 자신 반, 그림자 반. 어두움을 맞이할 때마다 뜨거운 노을 속에서.





3월 2일 연재 예고.


라이프 느와르 8화.

'방'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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