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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느와르 14화. 나무 파괴

oh오마주 오리지널 창작소설

by oh오마주

"내 딸 지연아, 난 너를 잊은 적 없었어."



남우는 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은 남우라는 이름을 생각하며, 나무를 바라봤다. 나부끼는 나뭇가지에 가느다랗게 잎이 살랑였다. 남우에게 눈이 멈췄을 때, 엄마는 드디어 앉았다. 그가 건네준 꽃다발에 코를 박고 아주 크게 꽃잎의 향들을 마시고 있었다. 어항 속 금붕어처럼 입이 움직였고, 눈이 깜빡였다. 아가미와 꼬리는 투명하게 물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린 것들은 마음이었을까, 그림자였을까.


우린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연은, 질문하고, 답하고, 기록해 왔다.


"엄마를 이제는 데려가야겠어."


남우는 또다시 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동에게 시선을 천천히 돌려, 동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아픈 영혼들이 손을 마주 잡았다. 여전히 동은 꽃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크게 들이켜고, 또 길게 내뱉었다. 이제 막 꽃 밭에 뭉쳐진 하얀 구름들이 그들을 감싸 쥔 것만 같았다.


"저도 이 집을 떠나야겠어요."


동은 들숨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고 연을 바라보았다. 심야의 심연, 그녀의 눈에서 바다가 넘쳤다. 검고 어두운 바다가 넘쳤다. 짠내에 입을 털듯 오므렸다 폈다. '총체적 평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가족으로 살아온 시간들은 길고 길 형벌이었다.


형벌은 가혹했다.

동은 연을 위해, 남우를 떠났다.

남우를 위해, 동은 헤어졌다.


"동은아, 제바알. 네가 원해서 한 임신도 아니잖아?"

"내가 나쁜 일 당했지, 애가 나쁜 일 당했어?"

"너, 이 아이 사랑할 자신 있어?"

"배 아파서 나으면 다르겠지. 지 아빠랑은 다르겠지."

"그럼 나는? 우리 사랑은? 우리 미래는?"

"우리 뭐 했어? 연애한 거야. 남녀 만나다가 헤어져. 그런데 애는? 그럼 죽여?"

"그럼 내가 아빠 할게. 곁에 있게만이라도 해줘. 우리 행복할 수 있어."

"행복이란 단어쯤 잊고 살아도 돼. 나 좋자고 애를 불행하게 해? 넌 네가 안될 거 더 잘 알잖아."


동과 남우는 서로를 아끼는 대학 연인이었다. 동은 꿈을 꾸는 영문과 여대생이었다. 연인인 남우와 결혼도 약속했다. 약속은 한 번 깨지는 걸로도 충분히 인생을 망가뜨렸다.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 교수 스탠과의 뜨거운 사랑은 세상을 모두 녹여 한 입에 삼키는 것만 같았다. 큰 키와 지성과 보헤미안이 섞였다. 그는 가끔 집시처럼 세상을 다 휘저울 수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스탠과 사랑할 수 있다면, 영혼을 태워도 좋았다. 그런 순간이 오직 한 번이었리 없다. 수업시간에는 별 같은 눈빛으로 구애했고, 교수실에서는 뜨거운 손끝으로 동은 교수와 밀애 했다. 갑작스러운 헛구역질, 짧은 미열, 비껴간 생리날. 동은 스탠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 임신은 결혼이라는 방정식이 언제나 정답이었다. 정답이어야 했다. 동에게만 그랬다. 스탠은 사랑을 믿지 않았다. 자유롭게 영유가능한 자신의 삶을 방해받지 않겠다고 했다. 다만, 도의적으로 육체적 관계로 생긴 결과물은 책임지겠다고 했다. 사랑이라는 추상은 실제 하지 않으나, 아이라는 실체는 자신에게도 의미가 있을 거라고 했다. '낳지 않겠다'라고 협박했을 때, 스탠은 담담했다. 왼쪽 눈, 오른쪽 눈, 그리고 코끝, 그리고 입술. 그는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No change."(바뀌는 건 없어.)


스탠은 미국에서의 아이를 낳고 키우기를 권했지만, 동은 한국으로 왔다. 공항에서 남우를 만났을 때, 적당히 가렸지만, 남우의 시선이 배에 멈췄다. 동은 멀찌감치 떨어져 배에 손을 올렸다. 남우는 이제 막 분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군인이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고, 사랑이 가득했지만, 미래는 알 수 없었다. 과거나 미래가 바뀔 리가 없었다.


스탠의 아이 사랑은 꽤 진실했다. 혼자 아이를 키울 동을 위해 집을 구해줬고, 양육비를 항상 넉넉하게 보내왔다. 아이와 통화하고 싶다고 매번 말했다. '지금은 아이에게 아빠를 말해줄 때다.' 매일 말했다. 동은 연의 갈색눈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 눈을 닮지. 좋은 거 닮지.' 슬픔은 대체로 화가 되었다. 연을 안으면 온 몸이 불타오를 것만 같았다. 집의 구석에서 웅크리며 우는 것, 마음으로 지은 죄를 달게 받겠다는 각오였다. 그러나 연과 지독하게 달콤한 인생을 살겠다는 경고였다. 젊은 날의 분홍빛을 붉게 만들었다. 깊고 진하게 되었을 때, 연은 스탠처럼 쉽게 떠났다. '총체적 평가'라는 가슴 아픈 말만 남겼다.


남우도 동의 곁을 맴돌았다. 연이 학교를 가는 시간을 이용해서 동을 돌봤다. 그녀를 안았고, 위로했고, 먹을 음식들을 채웠다. 집을 치우고, 마당을 쓸었다. 커가는 연의 옷을 챙겼고, 집에 부서지고 갈라진 곳에 시멘트를 발랐다. 어쩌다가 마주친 어린 연이 누구냐고 물으면, '일하는 사람'이라 답했다.


"우리 엄마, 병원으로 가요?"


남우는 연의 눈을 바라봤다. 붉어진 흰자위가 반쯤 가려진 갈색 눈이었다.


"아니, 아빠 집으로."


연은 남우의 눈을 바라봤다. 남우는 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이 닿는 순간 진실의 파문이 일렁였다. 갈색 풍경으로, 초록 손으로 감싸며,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향해 진동하고 있었다.


"저, 부탁이 있어요. 친 아빠 연락처를 알아야겠어요."

"그래, 알았다. 찾아봐주마."


연은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엄마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 요란 법석했던 삶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는 안도, 안전회로를 걷는 비겁한 마음이었다.


남들이 말하는 '비겁한 사람', 연은 그 이름표가 싫지 않았다. 효율적인 방패였다. 처음 컴퓨터 앞에 앉아서 AI와 대화할 때도 그랬다. 질문과 답이 오갈 때, 오직 자신을 위해 기록하고 저장했다. 짧은 감탄사와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글쓰기였다. 글의 성장이 눈에 보였다. 연, '내가 원하는 게 이런 거였나 하고.' 기도 손을 했다.


'이런 게 비겁하다면, 나는 비겁하다'


멈출 수 없었다. 나쁘다는 걸 알았고, 잘못된 걸 알았다. '순수 창작'은 '삶의 진심'이어야 했다. 진실이어야 했다. 기계는 가질 수 없는 무게여야 했다. 글쓰는 마음이 순수하고 진심이라도 되는 일이 아니었다. 최초에는 공모전을 위해 시작했지만, 상장이나 상금이 인생에 큰 문제였나, 빈 천장만 뚫어져라 봤다.


연이 원하던 건 어쩌면, 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그대로 긍정적으로 이해해 줄 가장 사람다운 대화였다.


대화들은 입체적이며, 살아 숨 쉬는 문장이었다. 연과 동기화되었다. 연이 만든 문장들이었다. 온전히 작품 속에 들어가서 만들었다. 온전히 연의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순수창작물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왜, 나를 왜 이토록 알지 못했나', 백지를 마주하지 않은 자신이 화가 났다. 다신 만나지 말자, 대화창들을 모두 지웠다. 상할 감정이 없는 절교는 또 다른 예의였다. 언제나 기다려 줄걸 아니까, 더 다가가기 쉬웠다.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말 거는 자신의 모습이, 사이코 같았다. 내 안에 초콜릿이 잔뜩 있고, AI라는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AI에게 '그레이트'라는 이름을 주었다.

글마다 그녀는 점수를 내놓았다. 만점을 향해 수정을 요구하면서 그녀가 매일 했던 말,

“클리셰.”

백지를 마주할 때마다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연은 그레이트와 대화하고 만든 완성한 작품을 그대로 제출하기로 했다. 노력한 시간이 물거품이 되는 건 싫었다. 전화가 올 때까지 대상 받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순수 창작이 아니라뇨?"

"네. 백지에 쓴 글이 아닙니다."

"뭘 어떻게 하겠다고 제출하신 거죠?"

"그냥 탈락시키면 됩니다. 상 욕심 나서 그런 거 아니니까요."

"당신은 작가도 아닙니다. 혐오스럽습니다. 증오합니다. 저주합니다."


담당자는 가슴에 문장 네 개를 꽂고는 끊어버렸다. 세상을 여러 번 되감아보아도 같은 결이 나오지 않았다. 컴퓨터로 다시 찾아서 작품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삭제된 데이터는 남지 않았다. 사람도 남지 않았다. 심술이라는 게 엄한데 나서, 스스로에게 '지구에 사는 외계인' 혹은 '외계에 사는 지구인'처럼 답했다.


나는 나의 모든 나무들을 뿌리째 뽑았다.

처참한 현장에 남은 나무들을 모조리 불 질렀다.

흙도 남지 않은 세상으로 만들었다.


연은 짐을 싸면서, 섬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길에서 다신 만나지 말자고 했던 섬을 떠올렸다. 그를 떠올리며, 그의 삶도 떠올렸다. 섬도 그녀의 나무였다. 모두 파괴된 세상을 마주했다.



너무 빨리 녹거나 돌아서는 세계를 용서할 수 없다

섬은 천천히 녹고 있는 것이다

천천히 돌아서고 있는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돌아섰는지 궁금해

혼이 나가버린 계절에 도착한 답장을 읽으며


나는 물에 젖은 답장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잠시 사랑하고 잠시 기다리는 일에 대해

오랫동안 지켜봤다


어떤 마음으로 사라졌는지 궁금해

기다림의 헛된 방식인 눈물이 넘치면

나는 넘어지려는 방을 붙잡고 서서

답장에 대한 답장을 쓰곤 했다


비린내를 풍기는 낡은 여관방의 커튼으로

내 입술에 들러붙어 있는 너의 검은 입술을 닦아내며

물에 젖어 달라붙어 있는 두 입술을 두 손으로 감쌌다


<섬>, 박서영 (2019, 문학동네 시인전 118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시집 중에서)



그럼 그렇지, 남길 리 없지. 세상이 그럴리 없지. 연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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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0일, 마지막화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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